△ 발효 1주년을 맞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은 한국 농업을 가장 심대한 타격을 줬다. 그러나 자유무역협정이 가져올 미래는 농업기반 붕괴보다 더 암울하다는 게 학자들의 지적이다. 사진은 지난해 3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국회비준을 반대하며 농성중인 농민들의 모습. 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진보평론’ 봄호 자유무역협정 비판 특집 며칠 사이, 각 언론들은 자유무역협정(FTA) 관련 보도로 바빴다. 지난달 30일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 1주년이었다. 때맞춰 정부는 2007년까지 최대 50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겠다고 밝혔다. 1년 전만 해도 자유무역협정은 찬반양론이 오가는 ‘뜨거운 감자’였다. 이젠 누구도 거스르기 힘든 ‘암묵적 대세’가 됐다. 노무현 정부와 대기업집단은 “한국의 살 길은 개방형 통상국가밖에 없다”는 기조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있다. 정통 좌파를 표방하는 <진보평론>이 그 대세에 딴지를 걸었다. 최근 발간한 봄호에서 자유무역협정을 특집으로 다뤘다. 이들은 자유무역협정을 “쓰나미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지구적 재앙”이라고 평했다. 쓰나미를 불러온 대지진의 진앙지는 미국이다. 미국은 부시 대통령 취임 이후, 양자간 또는 지역간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본격화했다. 이와 함께 다자간 무역협정을 뼈대로 하는 세계무역기구 체제도 근본적인 변화를 시작했다. 이는 “미국식 일방주의, 미국식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전적으로 궤를 같이 하는 것”(이해영 한신대 교수)이다. ‘다자협의’보다 훨씬 수월하게 “미국이 우월적 지위에서 협상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영 교수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FTA 물결이 “국민국가와 그 국민에 대한 자본 내지 기업의 전지구적 쿠데타”라고 지적했다. △초국적 기업에 대한 내국민 대우와 최혜국 대우 △초국적기업에 대한 이행의무부과 금지 등으로 구성 되는 자유무역협정은 초국적자본에게 국민국가 단위의 저항이나 감시를 무력화시키는 ‘절대권능’을 부여한다.
1년 전만 해도 뜨거운 감자
이젠 암묵적 대세인가
초국적 자본에 묻는다
정당한 절차 거쳤는지 실제로 FTA 관련 분쟁 조정기구인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조정센터(ICSID)에 제소된 170여건의 사건 가운데 절대 다수는 초국적기업이 제3세계 개도국을 상대로 한 것이다. 자유무역협정이 미국식 신자유주의 세계전략의 진정한 ‘하드코어’라는 지적도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자유무역협정이 상징하는 부시 행정부의 세계경제전략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낮다. 이라크 침공으로 표상되는 부시 행정부의 세계군사전략에 대한 관심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인식의 부재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인데, 한국이 FTA 물결의 최전선에 서있기 때문이다. 스크린쿼터 논란으로 대표 되는 문화산업 분야에서 한국은 “문화 패권을 확대하려는 미국의 입장에서나 이에 맞서는 나라들의 입장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고지”(최영재)가 됐다. 한국의 농업기반은 가장 극단적으로 궤멸한 경우다. 식량자급률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구제금융 이후 “신흥시장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이미 충분히 개방되고 자유로운 한국 금융시장에 대해 미국 자본은 투기자본에 대한 안전판까지 요구”(장화식)하고 있다. 이는 다시 국가기간산업과 교육산업 등 그동안 ‘무풍지대’에 놓여있던 모든 산업 부문으로 급속히 번지고 있다. <진보평론>이 내놓는 저항의 대안은 민주주의다. 국민의 생활에 중대한 변화를 야기하는 “자유무역협정 체결이 입법부의 감시로부터 자유롭고 행정부 내에서도 외통부만의 잔치”로 전락했기 때문에 “조약체결 절차의 민주적 정당성을 따져야 한다”(양희진)는 것이다. 조약체결과정을 규정한 새 법률 마련도 제안했다. 그러나 ‘민주적 통제’라는 큰 방향을 제외하면 구체적 대안은 마땅치 않다. 자유무역협정은 한국사회 좌파의 역량으로 감당하기엔 너무도 거대한 ‘쓰나미’인 것일까.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신자유주의, 휴머니즘의 비극적 극단” ‘문화/과학’ 최근호 WTO체제 다뤄 공교롭게도 한국사회 신좌파를 대표하는 <문화/과학> 역시 최근호에서 자유무역협정을 배태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를 특집으로 다뤘다. 다만 그 접근방식은 <진보평론>과는 다르다. 이들이 보기에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휴머니즘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에는 인간중심의 근대이성주의를 근본적으로 회의하는 신좌파의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가 삶의 파괴 그 자체”였고, 이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일련의 ‘지배적 인간형태’”를 통해 관철됐다고 지적했다. 신지식인·웰빙족 등이 대표적이다. 세계무역기구를 둥지로 삼은 신자유주의는 이런 ‘지배적 인간형태’를 세계적으로 강요하는 휴머니즘의 비극적 극단이라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이득재 대구카톨릭대 교수는 그래서 “자본이 (세계자본주의체제 아래서) 매끄럽게 미끄러질수록 우리의 인간적인 삶은 계속 불안정해지고 비인간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비인간화’의 전복은 인간이란 관념의 해체와 잇닿아 있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는 “완성된 인간이라는 관념을 지닌 채 … 인간해방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며 “휴머니즘 비판으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새로운 인간이 되는 길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는 그 길을 △다중·소수자의 문화적 역량 증대 △국가의 민주화와 창조적 재전유 △소수자의 투쟁과 민중생존권 투쟁의 결합으로 제시한다. 주어진 ‘인간형’을 거부하는 다양성을 확보하되 정통좌파가 말하는 ‘민중’과 신좌파가 주목하는 ‘다중’의 유연한 결합으로 일상과 국가를 동시에 변화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의 경계를 넘나드는 신좌파의 철학적 탐색도 갈증을 완전히 해소하진 못한다. 자유무역협정과 세계무역기구를 의심하라는 ‘경고방송’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쓰나미의 거대한 물결 앞에서 여전히 2% 부족하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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