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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03 17:28 수정 : 2005.04.03 17:28

잣나무로 만든 삼층탁자. 나무결 무늬의 자연미와 공간분할의 묘미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⑫ 사랑방 목가구

일체의 장식없이 나뭇결만이…
단정한 선·뚜렷한 면 오롯이
많은 선비들 칭송하였구나

옛적 선비들의 공간인 사랑방에 들어가는 것은 본디 마음을 맑게 닦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사랑방을 맑은 자연공간에 빗대어 청재(淸齋), 산재(山齋) 등으로 불렀다. 정갈한 마음으로 옷매무새 고쳐잡고 아랫목 앉으면 문방사우 놓여진 서안(책상)과 벼루상(연상), 책장, 문갑, 붓걸이와 사방탁자 등을 보게 된다. 바로 목가구다. 서너평의 좁은 사랑방에 담박한 운치를 띄워주는 이 공예품이야말로 선비적 수양관을 드러낸 사랑방의 실체였다. 장식 빼고 나뭇결 무늬만 살린 채 흑빛, 갈색빛을 내는 목가구들은 성리학의 검약한 기풍을 생활에 실천하는 대상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오늘날 고미술시장에서 사랑방가구들은 모던하고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환영받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미감이 단순한 디자인 감각의 산물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생활공간에서도 수신제가의 원칙에 철저했던 조선선비들에게 고가구의 배치와 사용방식은 치열한 사색과 지행합일의 정신을 드러내는 실천 자체였다. 그들 자체가 백성의 사표가 되는 이념적 인격체였기 때문에 사용하는 목가구는 색채의 현란함을 피하고 금욕적 원리를 드러내어야 했다. 조선 숙종 때 나온 사랑방 인테리어 지침격이라할 <산림경제>(홍만선 지음)의 ‘청재 위치조’를 보자.

‘책상이나 연상을 만들 때 다리와 상판 사이에 목제 띠나 조각 등의 운각을 붙이면 잡스러워진다. 금속으로 된 금구장식을 붙이면 안된다. 붉은 칠이나 황칠도 하면 안된다. 문갑에도 기괴한 꽃을 새기지 말아라. 조촐한 것만 못하다. 서가에는 잡서를 꽂지 말아라…책을 방모서리에 누여 기둥처럼 쌓지 말아라. 잠깐 쉬는 평상도 고목둥치를 사용해 만들되 새나 짐승 같은 것을 새길 생각도 말아라…’

사랑방가구의 매력은 단정한 선과 명확한 단면으로 특징지워지는 자연미다. 사방탁자만 해도 사방이 트인 뼈대로만 짜여져 현대적 구성미를 물씬 풍긴다. 충청도 우암 송시열 종가에 있는 우암 서안은 도끼로 한가운데를 콱 찍은 큰 통나무를 그대로 썼을 정도다. 어떤 장식이나 치레를 거부하는 선비정신의 발로였기 때문에 목가구에는 주인의 예절과 취향, 안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손때 묻히며 조심스럽게 관리할 수밖에 없던 금도가 있었으니 애정이 생겨난 것도 당연하다. 목가구, 문방사우 등 기물에 주인의 성찰을 담은 글을 새기거나 쓴 기물명(器物銘)이 이런 풍토를 보여준다. 고결한 정신적 수양의 덕목으로 기물을 관찰하는 인문적 풍토 속에서 선비들은 고가구와 무언의 대화를 줄곧 나누곤 글을 남겼다. 고려의 문인 이규보가 책장을 보며 새겼다는 ‘장서벽감명’에서 우러나는 절절한 정감은 인상적이다. ‘옛 사람의 뼈는 이미 썩었으나/ 그 말은 이 벽에 담겨있고/ 내 마음 속에 그 이치가 있으니 구하면 무엇인들 얻지 못하랴...’

백사 이항복이 벼슬을 물러난 뒤 책상인 서상을 보고 지은 사언시는 촌철살인의 기지로 넘친다.‘백수가 되도록 돌아갈 곳이 없고/ 의지할 데도 없으니 책 읽는 즐거움 오죽하리/ 낮이나 밤이나 너를 보며 몰두하면/ 세상살이 큰 치욕은 면할 수 있네/ 너를 편안히 여기니 벼슬길 보다 좋은 별천지인 것을’

조선 정조때의 명재상 채제공의 ‘책궤명’이란 사언시도 재미있다. 그는 책더미를 쌓는 책궤를 일컬어 ‘책 안에 도가 실렸고 너는 그 책 싣고 있구나 너는 지각 있는 생물은 아니지만 역시 성인의 무리로구나’라고 하면서 아예 성인반열에 올렸다. 하지만 낮잠자거나 쉬는 평상에 대해서는 ‘군자가 몸만을 편안히 여기는 것은 군자의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래서 너 같은 것 있어도 좋고 없다해도 손해볼 것 없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15세기 문인 김일손도 ‘서안명’이란 시에서 ‘그 바탕이 나무라 화려하지 않으니/나는 너와 같이 하련다/고요히 있지만/용도는 제한이 없어/아침저녁으로 이 늙은이를 대하노라’면서 서안에 기대어 독서와 사유를 하며 동서고금의 진리에 다가가는 희열을 읊었다. 현대인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정신적 추체험을 선비들은 책상과 연상 등의 목가구에서 끌어내면서 자신을 경계하고 다잡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사랑방 가구와 주인의 고고하고 애틋한 인연은 19세기 말 서구문명의 도래 뒤 급격하게 퇴색해버린다. 지금 인사동 골동가에서 흔히 보이는, 금속 장석을 마구 붙이고, 책그림, 병풍 등을 요란하게 붙인 잡다한 20세기초의 목가구들은 유교적 공간 문화가 물질문명의 소비문화에 밀려났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선비들에게 목가구는 세상이치를 통하는 격물치지의 창구였으며 분신과도 같은 것이었으나 지금의 가구 문화는 쓰고나서 내치는 소비만 있을 뿐이다. 불과 100여 년 사이 사물과 세상, 인간의 관계맺는 방식이 변했음을 목가구 변천사는 일러주고 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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