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05 17:47
수정 : 2005.04.05 17:47
|
하녀가 테니스 셔츠를 입고 주인을 유혹하는 장면. 사진 리차드 터민
|
춤? 연극? 어떻게 보든지
2000년도 토니상 뮤지컬 작품상을 가져간 <컨텍트>는 뮤지컬계에 일대의 논란을 불러왔다. 이 작품을 위해 작곡된 오리지널 곡이 한 곡도 없으며 어떤 등장인물도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 한 곡도 부르지 않고 심지어 대사도 지극히 제한되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댄스 플레이’라는, 브로드웨이에서는 일찌기 시도되지 않았던 장르를 하나 추가하는 데 한몫했다.
2005년 3월 말, 브루클린에 위치한 BAM(Brooklyn Academy of Music)의 하비 극장에서 올려진 매슈 본의 최근작 <말없는 연극>(Play Without Words) 역시 이러한 논란의 여지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확실히 ‘춤’이다. 하지만 가끔 춤 자체만의 즐거움에 빠져들곤 하는 춤의 탐닉으로부터 이 작품은 한 발 벗어나 있다. 남자들이 추는 <백조의 호수>로 일생 춤 한 번 안 보던 사람들까지 춤바람 들게 했던 안무가 매슈 본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것은 춤에 일자무식인 사람들도 끌어들이는 알기 쉬운 ‘이야기’때문이다. ‘이야기’는 춤에 무지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그의 미끼다.
춤으로 연극에 다가선 것은 매슈 본이 결코 처음이 아니다. 독일의 피나 바우쉬 역시 드라마를 춤에 끌어들인다. 하지만 매슈 본은 그보다 훨씬 대중적이다. 춤이 발레의 시대를 지나 모던의 시대로 접어들며 몸짓 그 자체에 열중하다가 다시 드라마로 돌아오는 이유가 뭘까. 게다가 연극 쪽에서는 배우들의 움직임과 대사를 극단적으로 제한하는 시도를 종종 하고 있는 로버트 윌슨같은 연출가가 있다. 춤이 드라마를 지향하는 동안 드라마는 춤과 같은 무언의 움직임을 지향한다. 그래도 매슈 본은 춤이고 로버트 윌슨은 틀림없이 연극이다. 춤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설명해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연극이 지겹게 느껴진다면 그 역시 쓸데없는 ‘말’이 많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는 춤’과 ‘말 많은 연극’이 그 중간에서 만나지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말 없는 연극>의 바탕은 해롤드 핀터가 대본을 쓰고 조셉 로시가 감독한 1963년 영국 영화 <하인>으로, 주변에서 인정을 못받는 부잣집 도련님을 그의 집사와 하녀가 굴복시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말 없는 연극>에서는 한 배역을 세 배우가 춤추는, 즉 삼인 일역을 시도하는데, 이 장치는 인물의 내면을 대신 말해주는 ‘분신극’과는 다르다. 내면을 말하는 것은 몸 그 자체고 이들 셋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여준다. 말 많은 연극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세 개의 몸은 한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을 간단히 거스른다.
원작이 지닌 공포영화같은 분위기는 싹 가셨고 대신 소심한 남자, 정숙한 여자, 동성애자 등의 감춰진 성적 욕구를 그대로 까발린다. 음악은 라이브 재즈 밴드가 맡았다. 음악을 맡은 테리 데이비스는 영화음악가답게 60년대의 분위기가 물씬 나게끔 마일즈 데이비스를 연상케 하는 쿨 재즈풍의 음악에, 전체 이야기를 하나 하나의 장면으로 나눠 세심하게 음악으로 끊어내어 관객의 호흡의 완급을 고묘하게 조절한다. 춤이든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이 작품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보는 눈에 따라 다르겠지만 재미있고 자극적이라는 사실만은 모두 동감할 것이다.
이수진·조용신 공연비평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