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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06 17:18 수정 : 2005.04.06 17:18





코라(khora)란?

플라톤은 우주의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 세 존재를 제시한다. 하나는 우주의 이법으로서, 세계 창조를 위한 모델로서 형상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질료의 차원으로서 질료에 형상(이데아)이 ‘구현’되어 사물들이 성립한다. 그리고 이 구현은 데미우르고스라고 불리는 ‘조물주’에 의해 이루어진다. 플라톤의 세계관은 전적으로 “제작적인” 세계관이라 하겠다.

형상의 차원은 질료의 차원을 “초월해” 있다. 즉 질료의 차원과 따로 존재한다. 이렇게 물질적 차원을 아예 초월한 존재를 먼저 상정하고, 그 뒤에 그 초월적 존재가 물질에 구현된다고 보는 사유를 ‘형상철학’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형상철학은 플라톤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주자, 라이프니츠 등 상당수의 전통 형이상학자들에게서 발견된다.

플라톤은 형상에 남성 이미지를, 질료에 여성 이미지를 투사한다. 질료는 때로 ‘코라’라 불리는데, 그것은 터, 바탕, 모체, 유모, 물질-공간(물질로 차 있는 공간) 등의 의미를 지니며 여성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데리다는 수동적 터로서 이해된 코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현대 사상의 한 성격을 표현했다.


어쩌면 코라는 민중이 아닐까
어법들에 의해 주물이 찍히듯이 만들어지는 대중이 아니라
자기조직화를 통해서 정치와 문화를 만들어가는
민중의 역능을 뜻하지 않을까
더 이상 아둔한 대중도, 한심한 우중도 아닌 ‘다중’ 차이를 만들어가는 다수의 민중

오늘날의 사상을 이야기할 때 ‘내재성’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 말은 ‘초월성’의 반대말이다. 현대 사상이 내재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곧 기존의 철학사상들이 이야기하던 초월적 존재들, 예컨대 이데아·신·선험적 주체 같은 존재들을 벗어나 모든 것을 평등한 차원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모든 것은 서로 관계맺음들을 통해 존재하며, 그런 관계망 위로 솟아올라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이런 사유는 철학사에서 종종 등장하긴 했지만, 그 본격적인 형태가 전면적으로 도래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푸코, 들뢰즈, 데리다를 비롯해 오늘날의(이미 고전이 됐지만)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모두 이런 내재성의 사유를 다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내재성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초월성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가장 강한 형태의 초월성에는 플라톤-기독교적 초월성이 있다. 기독교의 초월성은 분명하다.(물론 유대-기독교적 신 개념 역시 비교적 구체적인 형태에서 점차 추상적 존재로 변해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플라톤이 그의 대화편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를 만든 조물주로서 데미우르고스를 이야기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액면 그대로 이야기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들이 존재한다. 데미우르고스를 기독교의 신에 근접시키는 한에서 플라톤-기독교적 초월성이 성립한다. 그러나 이 강한 의미에서 초월성이 초월성의 전부가 아니다. 따라서 이 초월성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내재성의 철학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뜻 내재성의 사상 같지만 초월성의 흔적을 강하게 간직하고 있는 여러 형태의 사상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새 정치·문화 만드는 주체

플라톤-기독교적 초월성이 아니라 해도 세계의 이법(理法)을 항구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사물들이 그 이법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사유도 사실상 초월성의 사유이다. 이런 사유에서 사물과 사물 ‘사이’는, 그리고 각 사물들의 ‘바깥’은 부차적이다. 이는 달리 말해 사물과 사물이 맺는 관계 자체가 어떤 항구적인 이법을 통해 고정돼 있다는 뜻이다. 이런 영원한 이법(태극·섭리·천명 등)의 개념에 근거하는 사유들은 개별자들을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들로 파악하기보다는 이법에 근거해 존립하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 이법에 초월성을 부여하는 사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성리학, 라이프니츠, 헤겔 등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체계들이―유연한 경우도 있고 강고한 경우도 있지만―기본적으로 이런 형태를 띤다. 이런 형태들 역시 완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사실상 초월적인 사유인 것이다. 만일 사물과 사물이 전적으로 우발적(偶發的)으로 관계 맺는다면, 즉 사물들 사이의 관계에 경험과 개별성을 초월한(a priori) 이법도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런 세계는 사물과 사물이 열린 관계, 우발적 관계를 맺어가는 세계, 모든 것이 (사물들과 사물들의) ‘사이들’에서 형성되고 변환되어 가는 세계일 것이다.



△ 데리다가 말하는 ‘잠재성과 긍정성을 가진 질료’ 로서의 코라는 자기조직화를 통해 새로운 정치와 문화를 만들어가는 민중을 연상시킨다. 그 민중은 ‘차이를 만들어가는 민중’ 이며 새로운 민중이다. 사진은 지난 2월 14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친시리아계 내각을 몰아내고 환호하는 시민들. <한겨레> 자료사진

이렇게 어떤 사상이 설사 관계적 사유의 형태를 띠는 경우라 해도, 그 관계들이 우발적인 것들이 아니라면 결국 관계들 자체가 실체화되게 된다. 이 경우 관계들의 체계가 이법의 역할을 하게 되며, 이 체계는 결국 개별자들을 초월한 무엇이 된다. 이런 경우는 ‘구조주의’라 일컬어지는 사유나 더 넓게는 자연과학적 사유 일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내재성의 사유는 플라톤-기독교적 사유만이 아니라 이법의 사유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근대 철학은 ‘선험적 주체’라는 또 하나의 초월성을 제시했다. 선험적 주체는 자연적인 존재, 경험을 통해서 이해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사물들의 차원을 초월해 있다. 칸트와 후설의 ‘선험철학’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이 두 사람이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을 구별하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것이 이 때문이다) 오늘날 내재성의 사유를 추구한다는 것은 고중세적인 실체/본질의 사유 못지 않게 근대적인 선험적 주체의 사유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근대 선험철학은 사물 일반과 선험적 주체 사이에 불연속을 놓고서 주체의 초월성을 사유했던 사상들이기 때문이다. 내재성의 사유는 우발적 관계들을 통해 접속되고 일탈하는 사물들의 운동에 초점을 맞춘다. 삶은 정해진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과 창조의 연속인 것이다.

데리다는 이데아, 신, 선험적 주체 같은 동일자(同一者)의 초월성을 매개해서 사물들을 재단하는 서구 형이상학의 폐단을 절실히 깨닫고 그런 폐단을 ‘해체’하고자 했다. 그 해체의 칼날 앞에는 고전적인 형이상학 체계들만이 아니라 현상학과 구조주의 같은 현대 사유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는 기존의 사유를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이지 ‘해체’라는 단어의 즉물적인 의미에서 무엇인가를 붕괴시키는 것은 아니다. 각 사유체계의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 묻혀 있는 측면을 캐내 그 체계를 (원래의 저자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탈구축’이라는 번역이 나을 듯싶다) 이 점에서 데리다에 대해 “해체 뒤에 남는 게 뭐냐?”, “해체 이후의 대안이 뭐냐?”라고 묻는 것만큼 아둔한 것도 없다. (‘대안’이라는 말만큼 ‘한국적인’ 말도 참 드문 것 같다)

데리다의 이런 작업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플라톤의 탈구축이다. 데리다는 여기에서 문자보다 음성을 중시하는, 따라서 현존(現存)에 특권을 부여하는 플라톤적 사유를 탈구축한다.(현존이란 나타나-있음, 즉 말하는 사람이 생생하게 현실 속에 나타나-있음을 함축한다. 그래서 문자보다 음성=목소리가 중요하다고 보는 생각은 현존을 중시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현존의 형이상학에 기초해 두 가지 언어를 구분한다. 영혼에 각인된, 즉 기억으로서 존재하는 살아 있는 언어와 문자로 기록된, 따라서 누가 어떻게 악용할지 알 수가 없는 죽은 언어를 구분한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묘한 역설이 존재한다. 만일 문자가 그릇된 것이라면, 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행위를 문자로 기록했는가. 그것은 스승에 대한 배신이 아닌가. 여기에서 데리다는 플라톤 사유에 존재하는 이중성, 즉 문자를 비판하면서도 문자에 집착하는 이중성을 읽어낸다. 즉 약(藥)이자 독(毒)으로서의 ‘파르마콘’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문자는 파르마콘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신화를 비판하면서도 대화편의 결정적인 부분들에서 신화를 끌어다대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잠재성 커 장자의 ‘허’ 비슷

플라톤이 우주 창조를 설명할 때 물질의 역할을 하는 코라(chora)를 재음미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코라는 파르마콘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목소리(누스=이성의 목소리)에 따라, 즉 이법에 따라 빚어지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려 한다는 점에서 플라톤 사유에서는 약이자 독인 파르마콘이다. 코라는 곧 이법이 강제하는 동일성에 저항해 차이가 생성하는 곳이며, 열린 관계들의 생성으로서의 ‘텍스트’가 짜이는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리좀의 공간이다. 플라톤은 이성=누스로써 이 코라를 제압하는 사유를 전개했지만, 데리다는 오히려 플라톤을 탈구축함으로써 코라의 의미를 극대화한다.

코라는 아마 허(虛)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허(虛)는 단지 텅 빈곳만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것들이 그곳으로부터 조직되어 나올 수 있는 잠재성, 카오스이기도 하다. 장자는 일찍이 이 허 개념을 빼어나게 사유한 바 있다. 데리다는 이 잠재성, 카오스의 긍정적 의미를 읽어내고자 한다.

어쩌면 코라는 민중이 아닐까. 위로부터 내리누르는 이법들에 의해 주물이 찍히듯이 만들어지는 대중이 아니라 자기조직화(自己組織化)를 통해서 정치와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민중의 역능(力能)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코라의 재음미는 민중의 재음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민중은 더 이상 불쌍한 인민도, 아둔한 대중도, 두려운 군중도, 한심한 우중도 아닌 ‘다중’, 즉 차이를 만들어가는 다수로서의 민중이다. 그것은 새로운 민중인 것이다. 데리다는 코라에서 새로운 민중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새로운 민중은 새로운 대지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민중의 탄생을 위해서는 아직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soyow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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