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 성읍마을의 한 전통가옥. 사진 왼쪽은 제주 전통가옥의 부엌(위)과 화장실(아래)이다. 남제주/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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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화만사성’ 주역 아비가 아니더라 어린 시절 수없이 들은 말 가운데 하나가 ‘문지방을 밟으면 재수가 없다’는 금기어였다. 여름날 낮잠을 즐기려고 문지방이라도 베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할머니의 말이 있었다. “문지방 베고 자다간 입 비뚤어진대이.” 지금껏 문지방을 밟았다고 해서 특별히 재수 없는 일을 당한 기억은 없지만 지금도 별 생각 없이 문지방을 밟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아마도 내면화된 ‘금기’의 효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금기어가 생겼을까? 물론 이는 문에도 신령한 존재가 깃들어 있다는 관념의 소산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 신화에는 문신(門神)에 관한 이야기가 드물다. 신라 때 처용의 얼굴을 문에 그려 붙여 역신(疫神)을 쫓았다는 이야기가 있고, 도교의 영향으로 신다(神茶)·울루(鬱壘) 같은 문신상이나 글씨, 혹은 ‘입춘대길’ 류의 문자를 붙이는 민속이 남아 있지만 문신의 유래를 알려주는 신화가 한반도 본토에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문신의 유일한 본풀이인 제주도의 <문전본풀이>가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문전본풀이>가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유일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정 등진 어리석은 아버지
아내도 몰라보고
일곱아들조차 핍박 살해? 옛날 남선 고을 남선비와 여산 고을 여산부인이 부부가 되어 칠 형제를 둔다. 자식이 많아 생활이 어려웠던 남선비는 쌀장사를 위해 배를 마련하여 오동 나라 오동 고을로 떠난다. <문전본풀이>는 이렇게 한 가정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곱 아들과 부모로 구성된 가정에 아버지의 부재라는 문제적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문전신(門前神)이 가정의 수호신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문전신의 본풀이가 가족 서사의 모습을 지니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아버지의 부재라는 문제적 상황은 이름도 요상한 노일제대귀일의 딸이 등장하면서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된다. 오동 마을 노일제대귀일의 딸이 남선비를 집으로 불러들여 내기 장기를 두어 배와 곡식을 빼앗아 버렸던 것이다. 오갈 데가 없어진 된 남선비는 간악한 노일제대귀일의 딸의 집에서 겨죽으로 끼니를 얻어먹으며 목숨을 연명하는 사이 눈까지 어두워지는 신세로 전락한다. 어리석은 아버지라는 신화적 모델이 수립되는 순간이다. 이제 공은 어머니 여산부인에게 넘어온다. 여산부인은 3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나선다. 오동 고을에 이른 여산 부인은 개를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를 듣고 찾아갔지만 남편은 아내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밥을 해 올리자 그때서야 부인인 것을 알게 되어 부부는 정회를 나눈다. 그러나 문제가 해소된 듯한 순간에 새로운 위기가 닥친다. 마침 집으로 돌아온 노일제대귀일의 딸이 목욕을 가자고 여산부인을 유인하여 연못으로 부인을 떠밀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여산부인의 옷을 입고 돌아가 행실이 나쁜 노일제대귀일의 딸을 연못에 빠뜨려 죽였다고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영문을 모르는 남 선비는 원수를 갚았다고 좋아하면서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다.
가정 문제 해결의 소임을 맡은 여산부인이 오히려 남편의 다른 여자에게 살해됨으로써 위기는 절정으로 달려간다. 노일제대귀일의 딸이 여산부인으로 가장하면서 이야기는 <장화홍련전> 류의 전형적인 계모담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무기력한 아버지와 악한 계모, 그리고 계모에게 핍박당하는 전실 자식의 구도로 전환된다. 끝내 전실 자식들마저 살해되고 말 것인가? 대체 이 가정을 되살릴 희망의 빛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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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을 나갔던 일곱 형제는 노일제대귀일의 딸이 집을 찾아 가는 모습과 밥상 차리는 것을 보고는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그 사실을 안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전처소생을 없애려고 꾀병을 부린다. 점쟁이를 매수하여 혹은 스스로 점쟁이로 꾸민 뒤 칠형제의 생간을 먹어야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남선비를 속인다. “설운 낭군님아, 그러거든 일곱 형제의 간을 내어 주면, 내가 살아나서 한 배에 셋씩 세 번만 낳으면 형제가 더 붙어서 아홉 형제가 될 거 아닙니까?”(안사인 창본) 이 말에 남선비는 칼을 간다. 어리석은 가부장의 신화는 계속된다. 이때 막내아들 녹디성인이 청태산 할멈의 도움으로 사실을 알고 자신이 형들의 간을 내어오겠다고 자원한다. 녹디성인은 현몽한 모친의 말에 따라 산돼지의 간을 가지고 가서 형들의 간이라고 속인다. 노일제대귀일의 딸이 간을 먹는 척하며 자리 밑에 묻어두고 피만 입에 바르는 것을 엿보고 칠형제가 달려들자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도망가 변소 발판에 목을 매 죽는다. 남선비도 덩달아 도망을 치다가 올레(제주도 가옥의 입구)의 정낭에 목이 걸려 죽는다. 희망의 빛은 지혜로운 막내아들에게서 방사되었던 것이다. 계모의 두 다리로 변소의 드딜팡(발판)을 만드는 등 처절한 복수를 끝낸 아들들은 이제 살해된 어머니를 찾아 나선다. 바리데기나 자청비처럼 서천꽃밭에 가서 환생꽃을 얻어 연못으로 달려간 칠형제는 뼈만 남은 어머니를 살려낸다. 이제 남은 것은 무속신화의 마무리가 그러하듯 등장인물들이 신직(神職)을 차지하는 일이다. 집으로 돌아온 막내아들 녹디성인은 추운 물 속에서 고생한 어머니를 따뜻하시라고 부엌의 조왕할머니로 모시고, 형들은 동서남북중앙 다섯 방위의 신과 뒷문의 신으로 좌정시킨다. 그리고 자신은 일(一)문전신이 된다. 죽은 아버지에게는 정낭신을, 노일제대귀일의 딸에게는 변소에서 죽었다고 측도부인 자리를 준다. 그런데 이런 집안의 신직 배치에는 뭔가 심상찮은 대립관계가 느껴진다. 좋은 자리를 차지한 신은 조왕할머니와 문전신이고, 나쁜 자리를 차지한 신은 측도부인과 정낭신이다. 이 선악의 대립을 더 분명히 하면 ‘조왕할머니↔측도부인’, ‘문전신↔정낭신’의 대립이다. 결국 측도부인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조왕할머니 여산부인을 죽였고, 정낭신 남선비는 문전신이 된 칠형제를 죽이려고 했던 셈이다. 문지방은 밟으면 안 되지만, 측간의 발판은 밟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는 것인가? 이 대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막내 녹디성인의 기지로
죽은 어미 살리고 혼란 수습
제주 ‘문전본풀이’ 는
모자중심 가족의 흔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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