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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20 16:40 수정 : 2005.04.20 16:40

상상적인 것, 가상적인 것, 판타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진실을 밝히는 작업보다 허망한 환상을 심어주는 작업이
거대한 산업으로서 군림하게 된다
지금은 객관적 인식을 기초로 한 현실개혁이 요청되는 시대다
잠재성의 사유가 중요한 것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새로운 무엇인가가 이 세상에 나타나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더 넓게 말해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던 무엇인가가 생겨나기도 하고 또 보이던 것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감각으로 확인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비가시의 세계, 감각을 넘어선 세계도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비가시, 비감각의 세계가 가시, 감각의 세계와 별도로 따로 존재할 리는 없다. 서울과 뉴욕이 따로 존재하듯이 그렇게 두 세계가 따로 존재할 리는 없는 것이다. 세계는 하나이다. 다만 하나인 세계가 우리에게는 감각으로 확인되는 차원과 확인되지 않는 차원으로 구분되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세계와 비-현실세계를 구분한다. 그런데 이 비-현실세계를 사유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그 핵심적인 것들 중 하나가 ‘잠재성’(virtuality)이다.

잠재성 개발할수록 진실 보여

바둑을 생각해 보자. 흑백의 바둑돌이 20개 놓여 있다. 두 기사가, 예컨대 이창호와 이세돌이 열심히 바둑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이미 놓인 20수를 볼 때도 있겠지만, 두 사람은 그 외의 공간도 샅샅이 훑어보고 있다. 두 사람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듯이, 이들은 지금 “수를 읽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수’라는 것이 무엇일까? 수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 없다. 그러나 바둑 두는 사람이 지금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길들’이라고 부르는 어떤 객관적인 것들을 보고 있다. 더구나 두 사람이 함께 그 길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한 사람이 홀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머리싸움’을 하면서 그들에게 공통된 길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길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 길들의 존재는 고수와 하수의 구분에도 중요하다. 만일 객관적으로 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누구는 그 길들을 더 잘 보고 누구는 더 잘 보지 못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고수이고 다른 사람은 상대적으로 하수가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수와 하수는 분명 구분된다. 하수가 보지 못하는 그 무엇을 고수는 본다. 하수가 살아나갈 수 없다고 판단하는 공간에서 고수는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을 읽어내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 즉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마음에는 보이는 것, 감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데 우리 정신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바둑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당구를 칠 때도, 야구경기를 할 때도, 미술관에 전시를 할 때도, 결혼식을 할 때도, 이런 차원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런데 이렇게 감각으로는 확인되지 않지만 우리의 머리로, 정신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존재론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 차원을 개념화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각별하게 새롭게 주목된 것은 ‘잠재성’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라이프니츠와 베르그송에 의해 다듬어졌고 들뢰즈에 의해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으며,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어질 핵심적인 존재론적 화두들 중 하나라 하겠다.

잠재성은 가능성과 다르다. 이것은 곧 현대 존재론의 잠재성과 컴퓨터 공학의 ‘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는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컴퓨터 공학의 ‘버추얼 리얼리티’는 ‘가상현실’이다. 철학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면 차라리 ‘버추얼 액추얼리티(actuality)’라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 가상현실은 잠재성이 아니라 가능성을 뜻한다.

잠재성과 가능성은 어떻게 다른가? 가상실재의 ‘버추얼’은 ‘가짜’라는 뜻을 함축한다. 가상현실은 실제 현실에 대한 지각을 바탕으로 그것을 변형시킨다. 예컨대 강아지를 지각해서 그것의 이미지를 만든 다음 그 이미지를 변형시킬 수 있다. 그래서 바로 그 강아지인데 꼬리를 두 개 가진 경우, 귀가 없는 경우 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가능적인 것은 상상적인 것과 통한다. 즉 현실에서 출발하되 그것을 변형시켜서 그것과는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상상적인 것이다. 때로는, 아니 상당히 자주, 이미 상상한 것에 다시 상상을 덧붙여 변형하며, 그런 변형을 계속된다. 이렇게 현실보다 훨씬 외연이 큰, 즉 실제 현실보다 더 범위가 넓은 차원이 가능의 차원이며, 가능의 차원은 상상의 차원과 같다.

판타지산업은 가상성 극대화

그래서 가상적인 것은 가능적인 것이고 또 상상적인 것이다. 이 가상=가능=상상의 차원은 인간의 주관의 차원이고, 이 주관이 인간이라는 존재 특유의 문명을 가능하게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오늘날 이 가상=가능=상상의 차원은 ‘판타지’라는 개념과 맞물려 있다. 상상을 동원해 현실과는 다른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을 ‘판타지’라고 한다. 오늘날은 판타지의 전성시대이다. 왜일까?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대중들의 심리와 그 심리를 파고들어 이익을 남기려는 자본주의, 그리고 이 두 존재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러지와 대중문화의 뒷받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따분한 진실보다 달콤한 거짓을 더 좋아한다. 현실을 정확히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현실을 바꾸어나가기보다는 허망한 판타지의 세계에 몰입함으로써 현실로부터 아예 도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심리를 자본주의가 놓칠 리 없다. 이로부터 영화를 필두로 해서 거대한 ‘판타지 산업’이 도래했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들(<반지의 제왕> <스타워즈> <매트릭스> 등등)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물론 이 산업은 기술적 장치들과 대중문화의 코드들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중, 자본주의, 테크놀러지, 대중문화가 교차하는 곳에서 판타지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객관적 인식이 개혁의 기초

잠재성은 가능성이 아니다. 잠재성은 상상적인 것, 가상적인 것, 판타지가 아니라 객관적 존재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쉽게 확인되는 차원이 아니라 지적 노력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차원이다. 직접적으로 확인되는 차원은 현실차원이다. 그러나 이 현실차원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잠재차원이다. 잠재성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현실성을 보다 확대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현실적인 것은 20개의 돌이지만, 잠재적 길들, 수들을 읽어냄으로써 그 20의 의미는 전혀 달리 읽힌다. 그리고 고수일수록 더 많은 수를 읽어냄으로써 그 20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더 많이 읽어내는 것이다.

잠재성을 읽어내는 것은 실천적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잠재적 차원을 더 많이 들여다볼수록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좀더 넓은 눈으로 읽어낼 수 있고, 그에 따라 현실을 좀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기에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는 객관적 진실보다는 주관적 쾌락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시대이다.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학문적으로 규명하고, 진실을 밝히는 작업보다는 재미를 추구하는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허상적인 이미지들이 더욱 각광받는다. 존재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는 예술적 고투는 외면당하고 싸구려 딴따라 같은 것들만이 온통 기승을 부린다. 이런 현실은 무엇보다도 우선 신문과 TV를 비롯한 대중매체들에 의해 조장된다. 진실을 전달해야 할 매체들이 선정적인 오락으로 뒤덮이면서, 자본주의의 힘에 압도되면서 매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연예산업으로 둔갑한 것이다.

상상적인 것, 가상적인 것, 판타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진실을 밝히는 작업, 객관적인 진리를 밝히는 작업보다 말초적인 재미를 주고 허망한 환상을 심어주는 작업이 거대한 산업으로서 군림하게 된다. 우리의 시대는 이런 현실과 싸우면서 객관적 진실의 인식을 기초로 한 현실 개혁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잠재성의 사유가 중요한 것이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soyow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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