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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28 09:49 수정 : 2005.04.28 09:49

해마다 8월15일이 되면 한·중·일 세 나라는 각각의 ‘기억’으로 이 날을 기념한다. 사진은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한국의 독립기념관, 중국의 인민항일전쟁기념관,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한겨레> 자료사진


한·중·일 함께쓰는 역사 함께여는 미래
⑩ 한·중·일의 8·15

사상 첫 동아시아 공동 역사교과서인 <미래를 여는 역사> 발간을 앞두고, 공동교과서 집필위원들과 함께 그 내용과 쟁점을 매주 수요일마다 소개한다. 후원: 2005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한 “식민지배 벗어나 독립 이룬 날”
중 “항일전쟁서 위대한 승리 거둔 날”
일 “패전한 날의 치욕” 은근히 강조

서로 다른 방식으로 ‘민족국가’를 형성해온 한·중·일 세 나라가 ‘국가의 이름으로’ 기억·기념하는 공통의 날이 하나 있다. 8월15일이다.

1945년 8월15일은 일본 제국주의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질서가 붕괴한 날이자, 새로운 동아시아 체제가 구축된 날이다. 2005년 현재, 한·중·일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대부분은 이 ‘1945년 체제’로부터 비롯된다.

한중일 공동역사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는 이 지점에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 8·15의 복합적·중층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가적 갈등’의 본질을 이해하는 길이라는 판단이 여기에 담겨 있다.

한·중·일에서 사용되는 중학생용 역사 교과서는 8·15에 대한 서로 다른 ‘국가의 기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국의 <국사> 교과서에서 8·15는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룬 날이다.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 우리 민족이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운동의 결실”이라고 말한다. 중국의 <중국역사> 교과서는 이 날을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날로 기억한다. 특히 미국·소련 등 연합국에 대한 설명을 최소화하면서 중국과 일본의 전쟁을 극대화하는 서술 끝에 “중국인민은 마침내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고 적었다.

일본의 각종 역사교과서에서 8·15는 패전의 날이다. 도쿄서적판 <일본사>는 미국의 본토공습과 원폭투하, 천황의 항복선언 등을 담담하게 적고 있다. 후소사판 역사교과서는 연합국의 ‘강제성’을 특히 강조한다. “연합국은 일본을 무력한 나라로 만들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거나 “(평화헌법을) 거부할 경우 천황의 지위와 점령 하의 일본에 보다 어려운 일이 예상돼” 이를 수용했다는 서술이 대표적이다. ‘패전으로 인한 치욕’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현행 역사 교과서로 8·15를 배운 한·중·일 학생들의 뇌리에는 ‘민족국가가 불러들인’ 8·15의 한 단면만 보게 된다. 반면 <미래를 여는 역사>는 제4장 ‘전후의 동아시아’ 편의 처음을 이렇게 시작한다. “1945년 8월15일 동아시아 각 국은 서로 다른 8·15를 경험했습니다.” 이제 8·15는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되는 날이 아니라, “동아시아 각 나라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들여다봐야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동아시아 나라 관계가 빚은 의미 주목
북한·대만 문제 설명 부족해 ‘아쉬움’

<미래를 여는 역사>는 ‘일본의 패전과 전후개혁’ ‘한국의 해방과 분단’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등의 항목을 통해 각 나라가 8·15 이후 어떤 길을 걸어 갔는지, 그 과정에서 이웃 나라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살펴보도록 돕는다.

특히 세 나라의 현행 역사 교과서가 가볍게 언급하거나 아예 다루지 않고 있는 ‘냉전 질서’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냉전의 실체를 모르고서는 일본 전후개혁의 한계와 한반도의 분단,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계도 있다. 동아시아 냉전의 또다른 상처인 ‘대만 문제’를 제대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북한’ 정권의 성립에 대한 설명도 빈약하다. 이번 공동교과서 작업에 북한과 대만의 역사학자들이 참가하지 못한 결과다. 공동교과서 집필위원인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는 “북한·대만을 포함해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공동의 역사교과서 집필은 앞으로 반드시 해결해야할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의미심장한 첫 걸음을 내디뎠지만, 8·15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가야할 길은 아직 멀었다는 이야기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일본 제국주의 지배 끝나자 냉전체제로 ‘새로운 대립’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과 함께 한국은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났다. 중국도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서 시작된 대립과 갈등은 끝이 나고, 동아시아는 평화를 맞이하는 듯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것이 곧 동아시아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동아시아 3국 사이에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조성되지도 않았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대신 동아시아는 또다른 대립과 갈등에 빠져들었다. 냉전체제가 본격화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은 세계 곳곳에서 대립했다. 두 진영이 가장 날카롭게 대립한 곳은 동아시아였다.

냉전체제 아래서 한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됐으며 이는 곧 전쟁으로 이어졌다. 자유주의 진영에 속한 남쪽과 공산주의 진영의 북쪽, 그리고 양 진영을 지원하는 주요 국가들까지 참전한 대규모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반도에서는 남북 사이의 대립이 계속됐으며,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갈등도 더 심해졌다.

중국도 냉전의 영향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한반도에서 남북의 대립이 심해지자 경제적·군사적으로 북한을 지원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중국은 나라를 세운 지 불과 1년만에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에서 중국도 수십만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많은 물적 피해를 입었다. 중국의 참전은 남한과의 적대적 관계를 더욱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일본에서 냉전은 군국주의 세력이 되살아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냉전체제 덕분에 일본은 패전국의 멍에 대신 동아시아에서 공산진영과 맞서는 기지 역할을 하게 됐다. 이때문에 일본 군국주의 청산은 철저히 이뤄지지 못했다. 일본은 한국전쟁의 특수 등으로 경제적 회복의 기회를 맞이했으며, 1951년 9월 열린 샌프란시스코 회의를 통해 태평양 전쟁의 책임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맺어진 미·일 안전보장조약을 통해 일본의 이런 지위는 더욱 확고하게 굳어졌다. 이로써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고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복귀하게 됐다. 그러나 이는 일본사회에서 종전의 보수세력이 다시 힘을 얻고 재군비가 시작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또한 한국·중국과의 배상문제는 처리되지 않았으며 관계도 개선되지 않았다.

이처럼 8·15는 동아시아에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냉전체제가 본격화하면서 동아시아에는 새로운 갈등과 대립이 계속 됐다. 한국과 중국, 일본이 화해와 함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것은 이로부터 상당한 기간이 흐른 뒤에야 가능했다. 김한종 한국교원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돌아오지 못한 한국인들

%%990002%% 1945년 당시 일본에는 전쟁 중 강제동원됐던 노동자를 비롯해 200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고국에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징용 등으로 사할린에 끌려간 한국인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전쟁이 끝난 뒤 소련과 일본은 (소련 영토가 된) 사할린에 남아있던 일본인에 대한 귀환 협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협상대상에서 아예 빠져 사할린에 그대로 남겨졌다.

황천길 된 귀향길 ‘의문투성이’
일본 남은 이들은 ‘차별투성이’

귀국 과정에서 불행한 사건들도 일어났다. 일본에 남은 한국인들의 집단행동을 우려한 일본은 한국인 노동자를 한국으로 송환하기로 했다. 1945년 8월21일 한국인 노동자와 그 가족 4000여명을 태운 일본 해군 군함 우키시마마루가 일본 북동쪽의 아오모리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배는 8월24일 방향을 바꿔 교토의 마이즈루항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폭발해 침몰하고 말았다.

4천여명 탄 우키시마마루 폭발·침몰

폭발의 원인에 대해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마루가 전쟁 중 미군이 투하한 기뢰를 건드려 발생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배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일어날 지 모를 보복을 두려워 한 일본 해군 장교들이 폭발에 관여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으로 549명이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정확한 피해 규모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남북 분단으로 인해, 자신의 이념과 출신 지역을 둘러싼 혼란이 일어나, 일본에 그대로 남아 재일한국인이 된 사람들도 65만여명에 이르렀다. 일본에 대한 미 군정이 실시되는 동안, 재일한국인들은 공식적으로는 일본 국적을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외국인 취급을 받는 모순된 정책의 대상이었다. 재일한국인들은 민족학교를 세워 한국어나 한국 역사를 가르치려 했지만,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금지됐다. 반면 다른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당국에 등록을 하고 외국인등록증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발효로 일본이 공식적으로 주권을 회복하자, 재일한국인들은 일본국적을 뺏겼다. 이들은 취업·주거·사회보장 등에서 여러 차별을 당했다. 1970년대 들어 재일한국인 2·3세들이 일본 시민단체 및 다른 외국인들과 손을 잡고 차별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 결과 사회보장이나 취업 등에서의 차별은 상당 부분 줄어들었지만, 국립대학 입학권이나 참정권 등 여러 면에서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 김한종 한국교원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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