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 안의 정경. 옛 궁궐터 초석은 대부분 땅에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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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반월성 “외로운 성 약간 굽어 반달을 닮았는데/ 가시덤불은 다람쥐 굴을 반쯤 가렸구나/ 성 언덕의 푸른 솔은 항상 울창한데/ 성 아래 계림의 누른 잎은 가을엔 쓸쓸하구나…” 고려의 문장가 이인로가 지은 이 한시 구절은 700여 년 전 경주 인왕동 옛 신라 궁궐 터 월성을 답사한 뒤 느낀 감회를 읊조린 것이다. 이인로가 살던 시절은 신라가 고려에 국권을 넘긴 지 불과 300여 년 뒤였다. 하지만, 휘황찬란한 전각과 보물창고, 정원이 가득했을 궁궐터는 가시덤불 울창하고 다람쥐들이 초석 사이 굴 파고 사는 들녘이 되어 있었다. 스러져간 신라의 영화를 단적으로 상징했던 이 유적은 고려, 조선 시대 답사객들에게 세월 무상, 인생무상의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하는 신라 명승지로 꼽혔다. 조선 초 조락한 궁터의 정경을 돌아 본 조위의 한시는 애조를 넘어 아예 흐느끼듯 비통한 심경을 막 내뱉어 낸다. “…신라 왕의 궁전이 다 먼지가 되고/ 우거진 풀밭에 사슴ㆍ노루가 뛰는구나/ 숲 까마귀 울다 흩어지고 석양이 붉은데… 나 홀로 헤매이며 눈물 줄줄 흘리네/ 동풍 맞으며 서서 멀리 바라볼 뿐이네…” 신라 쇠망뒤 성터 덤불로
이인로·조위 무상 노래
박정희정권 유적 파헤쳐
지금은 승마장 신세 반월성으로 흔히 불리우는 월성을 지금 사람들은 국립 경주박물관과 안압지 사이 길쭉하고 도톰하게 솟은 언덕쯤으로 기억한다. 왕성 터라는 상식보다는 안압지를 구경한 뒤 올라가 산책하거나 뛰어노는 풀밭 유원지로 여기기 십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옛 전각 터가 묻힌 월성 안에는 2년 전부터 말뚝을 박고 말 타기·활 쏘기 체험장이 성업 중이다. 배드민턴 장 등의 운동시설도 있다. 민간 업자와의 계약 때문에 말똥 냄새 진동하는 목장을 계속 운영해야 한다는 경주시의 배짱과 방관하는 문화재청의 무관심에 현장을 본 애호가들은 경악하곤 한다. 궁터를 목장감으로 점찍은 후대인들과 달리 남천 시냇가를 끼고 경주 벌 굽어보는 반월성 지세를 신라인들은 일찍부터 알아보았다. 고신라 탈해 왕이 땅 주인 호공을 사기 계략으로 속여 땅을 가로채고 터를 닦았다는 역사서의 기록이 전한다. 신라 파사왕 22년인 101년 처음 궁궐로 삼은 월성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대규모로 성역을 넓힌다. 둘레 1.8km, 넓이 5만5000평의 성곽 내부 말고도 부근 안압지와 첨성대, 경주 박물관 권역까지 거느렸으니 지금은 다소 떨어진 황룡사, 분황사와 직통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70년대 이후 성곽 주변 발굴조사로 성벽 동북쪽에 방어용 연못 해자가, 동쪽 첨성대와의 사이에도 관청터로 추정되는 대형 집단 건물 터가 발굴됐다. 월성이 관청가와 결합한 통치 집단의 거대 단지였음이 증명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70년대 신축 당시 장대석과 거대 건물터, 인공산 등이 확인된 국립 경주박물관 터에서는 최근 미술관 공사 때도 대형 우물과 ‘남궁’글자가 새겨진 기와 등이 나와 궐역 크기를 다시금 짐작케했다. 사서에는 성 안에 귀정문, 임해문, 남·북문 등의 9개 통문과 왕이 신하, 사신들의 인사를 받던 조원전·숭례전, 정사를 베풀던 남당, ‘만파식적’ 등의 보물을 소장했던 내황전 등의 위풍당당한 건물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지난해에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월성 안 공터에 지하투과 레이더를 쏘아 탐사한 결과 땅 밑에 대형 건물터 7곳과 출입문 터, 연못터 등이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성 바깥의 건물 배치를 밝히는 종합 보고서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일어난 근대 식민지 시기에도 월성은 주목받지 못했다. 사찰터와 고분을 파헤치는 데는 열심이던 일본인들은 초석도 거의 사라진 옛 궁터 풀숲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월성을 해방 뒤 관심사로 떠오르게 만든 주역은 뜻밖에도 박정희 정권이었다. 유년기부터 경주에 관심이 지대했던 박정희는 70년대초 청와대 비서실에 경주개발기획단을 두어 황남대총, 황룡사 터 발굴과 함께 월성 발굴을 점 찍었다. 당시 얕았던 고고발굴 수준에서 원상 보존 대책보다 멀쩡한 유적을 덮어놓고 파헤치려는 의도에 많은 학자들은 반대했지만 유신권력의 강압을 피할 수 없었다. 천마총을 팠던 경주고적 발굴단은 마지못해 성벽터 안 두 곳에 발굴갱을 팠다. 운이 좋았는지 그 즈음 인근 안압지 연못 정비 중 엄청난 고급유물이 쏟아졌고, 전면 발굴로 확대되면서 월성 발굴은 미뤄졌다. 이후 몇차례 더 발굴을 채근하는 지시가 있었지만 79년 10·26사태로 박 정권이 종말을 맞자 계획은 흐지부지되어 버린다. 발굴단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음은 물론이다. 현재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성발굴을 장기과제로 올려놓고 있다. 그 시기는 언제일까. 유적을 그대로 보존하자는 의견과 유적 재활용을 위해 파보자는 찬반론은 여전히 팽팽하다. 지금 말 발굽 소리 울리는 월성은 우리 시대 문화유산 정책의 지혜를 따지는 시험대임에 분명하다. 고려 후기 문신 장일의 월성 답사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4백 년 동안 왕과 왕족들의 집, 다투어 전각과 누대(樓臺)를 지어 몇 번이나 웅장함을 자랑했던가? 지금 그 화려하던 것 누구에게 물으랴. 들 살구, 산 복숭아가 꽃이슬에 울 뿐인데…”
경주/글·사진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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