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탄은 이정의 ‘삼청첩’ 화폭 위 대나무 가지는 불어오는 바람에 활처럼 휜 채 맞선다. 갸날픈 윗 가지와 댓잎들은 바람에 못 이겨 하늘거리건만 줄기의 본체는 끝내 스스로를 지탱한다. 허공을 찌르듯 꿋꿋이 뻗은 댓잎 끝에서도 굳건한 기개가 번뜩인다. 어떤 시련에도 굽히지 않겠다는, 선비 정신의 고갱이가 묻어나오는 그림, 곧 ‘풍죽(風竹)’도다. 이 ‘풍죽’은 조선 중기 대나무 그림의 대가였던 왕족 화가 탄은 이정(1554~1626)의 걸작인 <삼청첩(三淸帖)>(간송미술관 소장)의 일부다. 우리 회화사에서 대나무 그림은 숱하게 그렸어도 지조를 목숨보다 중히 여긴 선비 정신을 <삼청첩>만큼 절절하게 상징화한 작품도 없을 것이다. 특히 대나무 일부분을 압축된 구도로 포착하면서 댓잎, 가지의 사실적인 묘사와 필선의 역동적 배치로 대 그림의 지사적 에너지를 강렬하게 분출시킨 것은 오직 탄은만이 낼 수 있는 분위기로 꼽힌다. 인란속 선비 지조
흔들림없는 대궁에
“천하의 보물이다”
문인들 앞다퉈 극찬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이정이 충청도 공주 월선정에서 흑비단에 금물을 입혀 그린 <삼청첩>은 문인들 사이에 일세를 풍미하는 보물이란 평가를 얻은, 우리 회화사상 최고 걸작 중 하나다. 12장의 대나무 그림과 난초, 매화 그림 등 전 20폭과 제시 5점 등으로 이뤄진 이 서화첩은 작가에게 가장 ‘행복한 그림’이기도 했을 것이다. 내로라하는 당대 문인들이 앞다퉈 발문인 제발, 감상평을 담은 찬시를 남긴 까닭이다. 39.3ⅹ25.5cm의 작은 크기에 문장가 최립의 서문과 명필로 유명한 한석봉의 제목 글씨, 차천로, 이안눌, 유근 등 당대 서화가, 문인들의 글들이 줄줄이 딸려있다. 조선시대 특정 그림을 두고 전문 비평과 발문 등이 잇따라 붙은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삼청첩>이 밀리언셀러를 방불케하는 이례적 명성을 묵향으로 누린 것은 대나무, 매화, 난 등의 특징적 면모를 절제되고 응축된 필치로 부각시키는 화면 운영의 능력과 그의 지사적 생애 때문이었다. 친구였던 최립은 <삼청첩>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그대가 그린 대를 보니, 성글어도 즐거움이 있고, 빽빽해도 싫지 않다. 소리가 나지 않아도 들리는 듯, 색이 같지 않아도 진짜 같다. 기운은 그리지 않았어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닥치는 듯 하고, 덕은 베풀어지지 않았어도 의젓하여 공경할 만하다. 그대의 뜻과 생각에서 나와 절로 만족스럽게 되었으니, 이것이 내가 아는 그대의 대나무네…’심지어 이안눌은 제시에서 ‘모양 바꾸어도 신선의 운치가 남아있고 이상한 향기 오는 듯 하다’면서 ‘인간들 티끌 받을까 두려우니 자주 보지말고 감추라’고까지 주문했을 정도다. <삼청첩>의 그림들은 대의 생태를 관찰한 양상에 따라 바람으로 흔들리는 모습인 ‘풍죽’, 다 큰 대나무를 그린 ‘성죽’, 늙고 큰 대나무를 이르는 ‘통죽’, 막 자라는 죽순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순죽’따위의 다기한 모습으로 나뉘며 운치 깊은 달 밤 매화, 난 그림 등도 끼어있다. 특히 대나무들은 사실적 사생력과 회화미를 갖추었으면서도 파격적인 대각선 구도나 댓잎?줄기의 예리한 표현주의적 묘사로 깊은 상징성까지 겸비하고 있다. 붓질 한번에 모양을 그려야한다는 원칙을 벗어나 섬세하게 여러번 붓질하며 명암 표현의 사실성을 강조한 통죽, 화면 위를 힘차게 가로지르는 대나무 줄기를 통해 생명력을 강조한 고죽 등에서 이런 장점이 여실하다. 이 절세의 걸작은 유명세만큼이나 제작 및 소장과정에서 사연이 많다. 이정은 <삼청첩>을 그리기 전 왜병에게 칼을 맞아 붓 잡는 팔이 거의 끊어질 뻔 하는 부상을 당했다가 간신히 회복한다. 30대부터 대 그림에 일가견이 있던 그는 이후 월선정에서 두문불출하면서 외세에 대한 불굴의 저항 의지를 화첩에 쏟아부었고, 그런 사정이 전란의 끝물에 서울에서 친구 최립을 만나 공개되면서 문인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최립이 문집 <간이집>에 남긴 글에서도 이런 사연이 보인다. ‘전쟁 뒤 삼년만에 만나, 한 권 보여주니 옥과 같은 대 그림이 머물러 있네/ 조물주가 그대 팔을 거의 잘랐으나, 남은 인생은 나와 더불어 맑게 살게 하려는가/…굳은 절개는 눈과 같아 응당 사랑할만 하네…’
후대에 윤신지(1582~1657)가 쓴 별도의 발문기록은 신비스럽기도 하다. 발문을 보면 <삼청첩>은 이정의 사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장자인 선조의 사위 홍주원이 강화도 전각에 피난시켰으나 곧 병화가 번져 여기도 불이 났다. 하지만 첩에 옮겨 붙은 불은 한석봉의 글씨 부분만 태우고 그림 부분에 이르자 곧 스스로 꺼졌다고 한다. “하늘이 단련시키고, 귀신이 보호하는 신물이라 훼손되지 않은 것”이라고 윤신지는 풀이하고 있다. 홍주원이 불 탄 한석봉 글씨의 별도 친필본을 친척에게서 찾아내 지금 모습으로 복원시켰다는 기록도 화첩의 가치를 반증한다. 19세기말 일본인 손에 넘어간 화첩을 간송미술관을 세운 전형필이 일제시대 되사들인 것 또한 이 절세의 그림이 지닌 필연적 운명이었으리라.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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