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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25 17:31 수정 : 2005.05.25 17:31

“나는 미쳐 버렸다/ 질서가 광기에 무너지고 있었다/ 지휘자에게 린치를 가하라!/ 드럼의 목을 잘라라!/ 금관악기를 도륙내라!/ 현악기를 피에 적셔라!/ 플룻의 목을 졸라라!/ 스트라빈스키의 봄이/ 성스러운 봄의, 무자비한 영화와 고통을 거느리며 도래하나니”

1913년 5월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 다녀온 영국의 전위시인 사순은 이런 싯귀를 남겨놓았다. 당시 그곳에서는 발레 뤼스의 신작 <봄의 제전>이 일대 난동 속에 초연되고 있었다. “이 따위 공연 집어치워”라는 외침과 야유조의 휘파람, 발 구르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다른 쪽에서는 “거 좀 조용히 합시다”라는 항의소리도 따라서 커지고 있었다. 결국 객석은 두 파로 갈라진 관객들의 욕설과 고함소리로 일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가뜩이나 요란했던 오케스트라의 연주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무대 뒤도 정신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안무를 담당했던 니진스키는 관객들의 태도에 분노한 나머지 무대위로 뛰쳐나가려고 바둥거렸고, 28살의 소심한 무명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그런 니진스키를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었으며, 흥행사 디아길레프는 객석을 어떻게든 조용히 시켜보려고 조명을 껐다 켜기를 여러차례 반복했다.

<봄의 제전>은 스트라빈스키에게는 일종의 신내림이었다. 디아길레프가 위촉한 발레음악 <불새>를 작곡하던 도중 그의 머리속에는 불현듯 원시종교의 제의식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무대 위에서 태양신에게 살아있는 젊은 처녀를 바치는 의식으로 재현되었다. 아무리 20세기 초의 파리가 퇴폐와 자유주의의 온상이었다지만, 그래도 기독교 윤리는 대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교도의 주술적인 내용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모독이었고 심장을 쿵쿵 울리는 원시적인 리듬과 익숙치 않은 불협화음 또한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든 요소였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난동이 단지 초연에만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평론가들에게 집단철퇴를 맞은 소심한 스트라빈스키는 더 이상 공연을 이어가기를 원치 않았다. <봄의 제전> 직후 그의 작품들이 잠시나마 실험적인 색채를 거두고 신고전주의로 회귀한 것을 보면 그도 어지간히 위축되었던 듯 싶다. 하지만 디아길레프의 주장으로 재공연은 강행되었다. 두번째 시도는 놀랍게도 환호와 열광의 도가니 속에 막을 내렸다. 처음에 비판의 칼날을 갈던 사람들도 태도가 바뀌어 쌍수를 들고 환영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봄의 제전>은 현대음악의 불멸의 이정표이자 고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렇듯, 모든 “고전”의 본래 이름은 다름 아닌 “혁명”이었다.

노승림 공연 칼럼니스트/성남문화재단 홍보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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