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31 17:59
수정 : 2005.05.31 17:59
|
5·16 군사정권과 전두환 정권은 모두 집권과 동시에 정권의 홍보를 위해 국악을 이용했다. ‘5·16 혁명 1주년 기념 국악제전’(1962) 포스터.
|
음악평론가 전지영씨 ‘근대성의 침략과 20세기 한국의 음악’ 펴내
국악과 군사독재 권력은 궁합이 맞는다?
음악평론가 전지영(34)씨는 <근대성의 침략과 20세기 한국의 음악>(북코리아 펴냄)이란 제목의 책을 내어, 정통성이 결여된 군사정권이 정권의 홍보수단으로 국악을 이용하고, 국악은 독재권력에 영합함으로써 민중의 삶과 유리된 길을 걸어왔다고 평가했다.
국악이 5·16 쿠데타 이후와 1980년대 5공 정권에서 전례없는 부흥기를 맞은 것은 당시 정권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하면서 전폭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악이 근현대사에서 가장 핍박받았던 분야 중 하나였던 까닭에 군사독재 시절의 문화정책에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던 분야인데도 현실에서는 정권의 정통성을 지지하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는 주장이다.
5공정권 홍보수단으로
창작국악 전례없는 융성
|
▲ ‘제1회 대한민국국악제’(1981) 포스터.
|
|
|
|
|
전씨에 따르면, 민족주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건 5·16 군사정권한테 국악은 요긴한 홍보 수단이었다. ‘대한민국 국악상’과 ‘5월문예상’을 마련하고 5·16 선전을 위해 신국악작곡공모를 시행했다. ‘혁명 1주년 기념 국악축전’에서 당선작 <새하늘>과 쿠데타를 찬양하는 <5월의 노래>(김기수 곡)가 연주됐다. 신국악작곡공모는 69년까지 이어지고 74년부터는 국립국악원 주최 한국음악창작발표회가 해마다 열리는 호황을 구가했다. 또 기악독주회라는 새로운 연주양식이 생기고 국악관현악단도 첫선을 보였다.
이처럼 창작국악이 융성한 것은 창작국악의 ‘새로움’, ‘서양적임’과 군사정권이 내세운 ‘근대화’가 근본적으로 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그러한 어용성(또는 ‘순수성’)으로 말미암아 유신헌법, 군사반란,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도 그 충격이 국악의 범주에 들어오지 못했으며, 수준 이하라도 ‘건전하면’ 널리 선양돼 양적 팽창과는 달리 질적 제고로 연결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전씨는 쿠데타 세력의 이익에 봉사한 김기수 전 국립국악원장이 일제 강점기에는 이왕직 아악부 학생으로서 친일곡 <황화만년지곡>을 짓고, 한국전쟁 중에는 북진통일·반공을 고취하는 어용 곡을 쓴 사실을 짚으면서 그가 국립국악원장을 지내고 국악 개척자로 인정되는 뒤틀린 현실을 꼬집었다.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 대학의 국악과를 김기수류의 인사들이 주도하면서 국악이 전근대적인 어용성을 갖게 되고, 음악적으로는 ‘정악’ 계통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잡게 되어 국악의 균형발전에 한계를 보였다고 분석했다.
5공 정권이 집권 초 ‘국풍81’과 ‘대한민국국악제’를 개최한 것도 5·16정권의 행태와 흡사한 것으로 지적됐다. ‘국풍81’에 김지하, 임진택, 김민기 등을 끌어들이려다 실패했지만 국악계는 이 행사에 착실하게 동원돼 참석했다. 대한민국국악제를 통해 영산회상, 여민락, 수제천, 가곡 등 대규모 전통음악 연주가 가능해져 원형보존이란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음악들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