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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9 16:44 수정 : 2005.01.19 16:44

“코드가 다르다” 는 말은
곧 “말이 안 통한다”와
거의 같은 뜻이 되었다.
그러나 코드는 달라도 대화는 해야 한다.
코드를 고정하기보다
오히려 ?P없이 깨나가는 것,
그래서 더 크고 포용적인 코드를 만드는 것,
이것이 우리시대가 요구하는 윤리가 아니겠는가

조선 시대에는 가족이 아닌 한 남녀가 동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남녀유별(男女有別)’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원리로 작동했다. 아니, 사실상 이 원리는 일방적인 원리였다고 해야 하리라. 남성의 경우 기생을 비롯한 다른 여성들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으나, 여성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남성들과 여성들은 화장실이나 결혼식장 등을 비롯한 특수한 장소들이 아닌 한(결혼한 부부들이 하필이면 왜 결혼식장에서는 갈라서 앉는지, 묘한 노릇이다) 더는 ‘유별’하지 않다. 극장에서, 운동장에서, 강의실에서 남과 여는 서로 섞여 문화를 향유한다. 1980년대만 해도 여학생이 교내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뺨을 때린 남학생이 있었다. 지금 그런 남학생이 있다면 그 남학생이야말로 뺨을 맞아야 할 것이다.



무엇이 변한 것일까? 무엇이 변해서 삶의 양태가 이렇게 달라졌는가? 물리적-생물학적 변화인가? 물론 아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의 디엔에이(DNA)가 지금의 우리 디엔에이와 다를리가 없다. 외형이 변했는가? 물론 적지 않게 변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가 삶의 양태를 이렇게 크게 바꾸어 놓았을 리는 없다. 변화한 것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곧 추상적인 그 무엇일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는 그 무엇인가가 (눈에 당장 보이는) 삶의 양태들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삶 지배하는 비가시적 존재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무엇, 그러면서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이 무엇은 무엇일까? 야구장에서 우리는 선수들, 심판들, 중계인들, 관중들… 을 만난다. 그리고 배트들, 글러브들, 공들… 같은 기구들이나 조명등을 비롯한 장치들을 만난다. 그리고 사건들이 벌어진다. 홈런이 터지고 아웃을 당하고 이닝이 바뀐다. 그러나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 외에 또 하나 핵심적인 것이 있다. 분명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그것이 없으면 야구 경기가 성립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이렇게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이면서도 우리의 경험을 지배하는 것을 우리는 관습이라든가 규범, 규칙… 등으로 부른다. 제사를 지낼 때 과일을 앞쪽에 놓는다든가, 물고기는 동쪽으로 놓는다든가 하는 관습을 비롯해 이 비가시적(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없다면 ‘사회’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비가시적인 존재, 그러나 가시적인 삶을 지배하는 존재, 이것을 언제인가부터 ‘코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날 ‘코드’는 일상어가 되었다. “너하고는 코드가 달라 이야기를 못 하겠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지 않는가. 현 정권 초기에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만 쓴다”는 기사를 자주 내보냈다. 코드란 무엇일까? 어떤 맥락에서 코드라는 개념은 오늘날 중요한 위상을 획득하게 되었는가?

‘코드’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은 ‘구조주의’라는 사조가 연구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무의식적 구조’,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 ‘차이들의 놀이’, ‘변별적 차이’, ‘에피스테메’… 같은 말들이 새로운 학술 용어들로서 도입되고, 때로는 일상 언어로까지 확대된 것은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의 도입과 더불어서이다.

처음에는 주로 언어학에서 사용되던 코드라는 말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을 거쳐 구조주의 사유 일반으로 퍼지면서 한층 일반적인 의미 내용을 담게 되었다. 코드는 사물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규칙, 특히 무의식적 규칙이다. 여기에서 ‘무의식’이라는 말은 그러한 규칙이 인간이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규칙이라기보다는 자연적으로(더 정확히 말해, 자연과 문화의 경계선상에서) 만들어졌으며 그래서 우리의 삶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하는 규칙이라는 뜻이다. 마치 태양과 지구가 물리학 법칙에 따라 관계 맺고 운동하듯이, 무의식적 구조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법칙들인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그의 학위논문에서 빼어나게 분석했던 ‘친족체계’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우리는 친족체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지 그것 자체를 크게 문제 삼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친족체계는 우리 문화의 무의식적 구조인 것이다. 구조주의는 친족체계만이 아니라 문화의 모든 측면들(식사법, 건축술, 신화, 놀이…)에서 이런 무의식적 구조를 발견하고자 했다. 이것은 사상사적으로 말하면 주체성과 자유에 강한 무게중심을 두는 근대적 사유에 대한, 곧 인간의 자기중심주의와 오만에 대한 ‘탈근대적’ 비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코드 밑바닥엔 권력의 의지

그러나 구조주의에 대한 지나친 경도는 자연스럽게 정치적 보수주의를 함축하게 된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코드들이 자연법칙처럼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사실상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목적으로 ‘만들어낸’ 것들이 아닐까? 친족체계조차도, 물론 기본적인 부분은 자연적이라 해야겠지만, 예컨대 고대 중국 주 왕조의 종법제도에서 볼 수 있듯이 권력층의 일종의 지배 전략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요컨대 사회의 코드들을 무의식적인 것으로, 자연법칙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코드들에 깔려 있는 ‘욕망과 권력의 놀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셸 푸코는 그의 ‘계보학’을 통해서 코드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일구어내었다. 곧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코드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으며 지금의 우리를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를 밝혀내는 ‘현재의 비판적 존재론’으로서의 계보학을 전개한 것이다. 구조주의로부터 계보학으로의 이행은 현대 사상사의 중요한 지도리(이정표)를 형성한다.

예컨대 감옥을 생각해 보자. 근대 이전에 감옥이란 형벌을 받기 위해 잠깐 기다리는 ‘대기소’였지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가진 곳은 아니었다. 형벌이란 기본적으로 공개 처형이었으며, 감옥이란 재판을 받거나 처형을 당하기에 앞서 죄인들을 잠시 가두어두는 곳이었다. 그러나 근대 휴머니즘이 도래하면서 감옥의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체형’이 금지되면서 형벌 자체가 죄인을 감옥에 얼마 동안 가두어둘 것인가의 문제로 변한 것이다. 이제 형벌은 감옥에 가두어 두는 시간으로 정해진다. 따라서 감옥은 그 자체 형벌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처형 장면을 보지 못한다. 그저 영화 등을 통해서 볼 뿐 처형 장면은 시민들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것이다. 감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또 정신병원은? 삶의 어두운 부분들은 모두 우리에게서 차단되어 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마치 우리는 낙원에서 살고 있는 듯이 착각하게 된다.

여기에서 감옥의 ‘코드’를 바꾼 것은 무의식적 구조도 아니고 자연법칙 같은 무슨 법칙도 아니다. 근대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를 지배하려는 ‘새로운 전략’을 짬으로써 코드가 바뀐 것뿐이다. 휴머니즘의 도래를 통해 인권이 강화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코드의 수립을 통해 지배의 전략이 바뀐 것뿐이다. 우리는 코드 아래에 깔려 있는 정치적 맥락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코드 개념은 원래 삶을 지배하는 어떤 보편적인 법칙을 추구하려는, 정신분석학의 무의식 연구나 인류학의 미개사회 연구를 비롯한 과학적 맥락에서 성립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사회에서의 ‘코드’ 개념은 오히려 다원화 사회, 상대주의 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곧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코드라는 개념에는 무수한 부분들로 쪼개진 사회집단들, 그들이 사용하는 (남들은 알아듣기 힘든) 용어들, 사고의 차이들, 소통의 부재… 같은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코드 개념은 어떤 일반적인 무의식적 법칙의 의미보다는 숱한 집단들의 동일성(또는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사고 패턴들, 용어들, 정치적 입장들… 등의 의미를 함축하게 된 것이다.

울타리 깨고 보편의 코드로

그래서 “코드가 다르다”는 말은 곧 “말이 안 통한다”와 거의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코드라는 말이 특히 노무현 정권의 수립과 더불어 유행하게 된 데에는 이런 맥락도 깔려 있다고 해야 하리라. 그러나 코드는 달라도 대화는 해야 한다. 코드의 문을 닫기보다는 다른 코드들과 끝없이 대화함으로써 자기 코드의 울타리를 깨고서 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볼 때 사람과 사람의 건강한 관계가 설 수 있지 않겠는가. 코드를 고집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코드를 끝없이 깨 나가는 것, 그래서 오히려 더 크고 포용적인 코드를 만들어 나가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가 아니겠는가.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 soyow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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