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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9 18:09 수정 : 2005.01.19 18:09

526년 겨울, 백제의 성왕은 웅진성을 수리하고 사정(沙井)에 울짱(柵)을 세웠다. 529년, 고구려가 북쪽 변방을 쳐들어와 혈성을 뽑았다. 좌평 연모를 시켜 보병과 기병 3만으로 곡산에서 맞섰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534년,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여름 사월 정묘일에 형혹(화성)이 남두육성(南斗六星, 궁수자리)을 범하였다. 천문에서 이러한 현상은 전쟁이나 재앙을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본다. 538년, 백제는 서울을 공주에서 사비(泗 )로 옮긴다. 나라이름을 남부여로 고쳤다.

‘사정’은 498년 동성왕 때 쌓은 사정성(沙井城)이다. 땅이름에서 백제본기에 ‘사정’(沙井)은 있으나 ‘사평’(沙平)은 없다. 신라본기에는 ‘사평’은 있으나 ‘사정’은 없다. 비슷한 사건을 다룸에서 나타나는 둘은 같은 땅이름으로 보인다. 백제때 사평현은 경덕왕 때 신평현(新平縣)으로 고쳤으며, 지금도 신평면으로 당진에서 갈 때 삽교방조제 못미쳐 있는 곳이다.

‘사비’는 지금의 부여로 백제 때 소부리(所夫里)로도 적었으며, 서울이 되기 전에 동성왕이 자주 사냥을 나갔던 곳이기도 하다.

추가령단층은 원산에서 서울을 지나 수원~평택~예산~청양으로 뻗는다. 낮은 곳을 이루는 단층선을 따라 좋은 교통로가 이어진다. 6세기초 백제는 고구려의 땅넓히기에 많은 압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방어성들이 있음에도 공주나 부여로 오는 북쪽 길목인 신평 일대에 울짱을 덧세운 듯하다. 고구려의 압력에 여지없이 밀려난 백제는 이를 만회하려 물건너 양나라와 외교를 펼쳤으나 어쩔 수 없이 공주에서 부여로 서울을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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