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
키는 크다? |
‘는’(은)은 말을 새로 시작할 때나 말이 바뀔 때 보통 문장 첫마디에 붙는다. 번역한 문장들을 다듬는 과정에서 되풀이되는 대명사 주어를 감추는 일도 하게 되는데, ‘그는’이라는 말을 없앨 때 ‘는’이 그냥 없어지지 않고 무엇이든 첫마디 말에 가서 붙는 것을 흔히 본다. “1986년에 그는 심하게 앓았다”에서 ‘그는’을 없애면 “1986년에는 심하게 앓았다”로 옆의 말로 옮겨가 붙는다. 이것은 말을 새로 시작하는 ‘는’이다.
‘도’는 이미 시작된 말을 같은 맥락에서 이어받아 계속할 때 쓰인다.
“나는 무섭다.” “나도.”
만일 뒤의 사람이 앞의 내용과 다른 것을 새로 말할 때는, “나는 안 무서운데”로 다시 ‘는’이 나타난다. 여럿을 잇달아 주워섬길 때 드러나는 두 가지 토씨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는 돈이 많다. 게다가 얼굴도 잘 생겼고 집도 부자다.”
이런 맥락에서 ‘는’이 접속사 ‘그러나’(but)와, ‘도’가 ‘그리고’(and)와 비슷한 구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는·도’는 그들이 쓰인 문장의 경계 안에서는 그 뜻이 드러나지 않고 그 문장의 경계를 넘어 이웃한 문장과의 연결 관계를 봐야만 비로소 분명한 뜻이 드러난다.
이는 일상의 말장난에도 자주 등장한다. 선보고 나서 “그 사람이 키는 커”라고 말하면, 그의 좋은 점들을 늘어놓자면 ‘키 큰 것’으로 시작해서 ‘키 큰 것’으로 끝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가 지닌 좋은 점이라고는 ‘키 큰 것’뿐이다. “키도 커”에는 말은 안 했어도 이 말 앞에 다른 좋은 점들이 더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는 좋은 점들이 더 있는데 키까지 크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이 간단한 토씨들이 가지는 미묘한 의미 차이를 분석은 못해도 알아듣기는 한다.
안인희/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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