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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7 18:07 수정 : 2005.01.27 18:07

제주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 성읍마을의 한 민가 처마에 내걸린 태왁(오른쪽). 태왁은 제주 해녀들이 물질에 사용하는 ‘떠있는 박’이다. 남제주/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창조의 씨앗 품은,
박을 켜세 박을 켜세

호공을 아는가? 박 호(瓠) 자에 남자를 높여 부르는 접미사 공(公) 자가 붙은 이름.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와 호공으로 불렸다는 남자. 신라 초기 역사의 몇 장면에 산발적으로 등장하지만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 뭔가 신화적 인물 같은 냄새를 풍기지만 신화를 잃은 호공. 2000여 년 전 경주 지역에 살았던 그를 아는가?

호공이 신화적 냄새를 풍긴다는 것은 그가 신라 건국신화의 주인공들과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신화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없어서는 안될 배역처럼 나타난다. 빛나는 조역이라고나 할까? 그가 등장하는 네 개의 장면을 따라가 보자.

기록에 남아 있는 첫 장면은 사신 호공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박혁거세의 사신으로 마한에 파견된다. 박혁거세 재위 38년의 일이다. 무슨 일로 갔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혁거세왕이 믿고 사신으로 보낼 정도면 호공은 박씨 정권의 깊은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별로 신화적 인물 같아 보이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다음 장면은 어떤가?

박혁거세의 사신으로
또는 석탈해에 집을 빼앗긴 이로
김알지를 처음 발견한 이로
사서에 남아있는 호공의 흔적들

신라 건국신화의 두 번째 주인공인 석탈해. 호공은 그의 이야기에도 감초처럼 등장한다. 용성국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알로 태어나는 바람에 궤짝에 넣어 버려진 석탈해가 흘러온 곳은 신라 계림 동쪽의 바닷가였다. 그런데 궤짝에서 나온 이 아이의 행동이 괴이쩍다. 토함산에 올라가 돌무덤을 만들어 일주일동안 머물다 나와 처음으로 한 일이 남의 집 빼앗기였다. 바로 이 장면에서 호공은 난데없이 나타난 석탈해에게 속아 집을 빼앗긴 비운의 사나이 역할을 한다.

석탈해가 몰래 호공의 집 옆에 숯과 숫돌을 묻어두고 본래 대장장이였던 조상의 집이라고 우긴 이야기.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가진 도래 세력에 의해 토착 세력이 밀려나는 것을 상징화하고 있다는 이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져 있어 재론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일종의 기만술이 신화적 영웅의 능력으로 신화에 자주 보인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석탈해만이 아니라 호공 역시 신화적 인물이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비록 승리자를 돋보이게 하는 조역의 신세지만.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잃었지만.


세번째 장면에서 호공은 신라 건국신화의 세번째 주인공 김알지의 발견자로 등장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탈해왕 9년 3월 밤중, 금성(월성) 서쪽 시림(계림)에서 닭 울음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동틀 무렵 사람을 보내는데 그가 바로 호공이다. 호공은 나무에 걸린 금빛 궤짝에서 나온 아이 알지를 발견한다. <삼국유사>에는 호공이 스스로 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다가 황금궤를 발견했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호공은 이상하게도 제 집을 뺏은 탈해왕의 신하가 되어 있다. 뭔가 수수께끼 같은 조역이 아닌가?

기록 속의 호공을 일찍부터 수상쩍게 여긴 이가 월북한 국어학자 홍기문이다. 그는 역사나 신화에도 관심이 많아 1960년대에 <조선신화연구>라는 책을 내놓은 바 있는데 그의 호공에 대한 추리는 이렇다. 혁거세 38년에서 죽은 61년까지가 23년, 2대 남해 차차웅의 재위 20년, 3대 유리 이사금 재위 33년, 4대 탈해 이사금 9년, 도합 85년. 따라서 알지를 발견하던 해에 호공의 나이는 적어도 100살은 되었다! 하지만 홍기문의 추리는 더 나가지 못한다. 기록이 없으니 더 이상은 알기 어렵다는 것.

그러나 생각해 보라. 신라 건국신화의 세 주인공과 다 관계를 맺은 인물이, 85년 이상 신라 왕가의 신하로 활동한 인물이 한 사람일 수 있겠는가? 호공은 특정 개인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호공은 분명 어떤 집단의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단군이 고조선의 건국주일 뿐만 아니라 고조선의 왕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인 것과 같다.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한 것도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호공의 정체를 밝힐 유일한 단서는 ‘이름’인 셈이다.

이름을 단서로 삼으려면 우리는 호공이 등장하는 서막으로 돌아가야 한다. 박·석·김, 세 시조와 어울려 있는 장면을 해명해 주는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장면이 있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족속과 성도 자세히 모른다. 본래 왜인으로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이라고 일컫는다.’ 이것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최초의 장면이자 호공의 정체에 대한 설명의 전부이다. 호공을 알려면 이 기록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기록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호공의 정체에 관해 오리무중에 빠질 수밖에 없다.

▲ 난생(卵生) 신화가 깃든 경북 경주의 계림. <한겨레> 자료사진



그런데 허리에 박을 차고 바다를 건너오다니? 박은 휴대용 물통일까? 아니 그보다는 물놀이할 때 사용하는 튜브가 떠오른다. 큰 박은 속을 파내면 튜브처럼 물에 뜨는 기구가 될 수 있다. 안에 옷가지를 넣을 수도 있으니 고무 튜브보다 낫다. 호공 족속은 아마도 허리에 구명조끼처럼 박 튜브를 하나씩 차고 배로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을까?

실제로 박은 여전히 물을 건너거나 물일을 할 때 유용한 기구로 사용되고 있다. 제주도 해녀들이 사용하는 태왁은 ‘떠 있는 박’이란 뜻이다. 해녀들은 물질을 하면서 채취한 해산물 망태를 태왁에 매달아 놓기도 하고, 태왁을 끌어안고 쉬기도 한다. 중국 하이난(海南)섬에 살고 있는 리족이나 먀오족은 지금도 물을 건너갈 때나 조개 등을 채취할 때 박을 사용한다. 제주도의 태왁과 재료나 기능이 동일하다.

그뿐이 아니다. 박은 호공 이전부터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춘추시대 문헌인 <국어(國語)>에는 ‘박은 맛이 써서 먹을 수는 없지만 물을 건너게 할 수는 있다’는 기록이 있다. 유명한 <장자(莊子)>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장자는 혜자(惠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제 그대에게 박 다섯 덩이가 있으니 능히 강이나 호수에 뜰 수 있을 걸세.” 중국 문헌기록에 따른다면 박은 이미 춘추시대부터 물을 건너는 기구로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공이 허리에 찬 박도 틀림없이 이런 박 문화의 산물일 것이다.

알에서 난 혁거세 성씨도 박이라
알과 박 사이 이 무슨 관계람
게다가 박을 타고 바다 건넜다니
호공은 왜인이요, 신라의 선주민?

▲ 중국 하이난 섬에 사는 리족의 한 남성이 박을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여기서 놓칠 수 없는 것이 있다. 박을 유용한 생활용구로 사용하는 민족들에게는 박을 조상으로 숭배하는 신앙이 있고, 그와 관련된 신화가 있다는 사실. 옛날 지상에 박이 자라났는데 어떤 것은 산보다 컸다. 홍수가 밀려오자 신은 박을 열고 가축과 동식물, 그리고 오누이를 넣는다. 홍수 후 오누이가 결혼해 자손이 번창했는데 리족과 한족이 여기서 나왔다. 하이난도 리족의 홍수신화이자 시조신화다.

같은 유형의 이족 신화를 보면 오누이가 결혼해 낳은 것이 박이었는데 박 속에서 이족 등 8개 민족의 조상이 나왔다고 한다. 작은 박, 큰 박 속에 빼곡이 들어있는 씨앗의 경험, 박을 타고 물을 건너는 생활문화가 ‘홍수-박-조상’을 잇는 신화를 주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호공 집단이 지니고 왔으나 잃어버린 신화는 이족이나 리족과 유사한 박 기원신화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흥미로운 대목은 호공을 사신으로 보낸 박혁거세 왕도 박과 무관치 않다는 사실이다. 혁거세는 알에서 나왔는데 진한 사람들이 알을 박이라고 했기 때문에 박(朴)으로 성을 삼았다는 것. <삼국사기><삼국유사>가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더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은 박혁거세의 발견자인 진한 여섯 마을 가운데 하나인 양산촌의 우두머리 알평이 표암봉(瓢岩峰)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다. 양산촌은 호공이 살던 바로 그 동네가 아닌가. 게다가 알평이란 이름과 표암봉 사이에는 알과 박의 관계가 숨어 있지 않은가. 알평과 혁거세와 호공 사이에는 박으로 이어진 모종의 미스터리가 깔려 있다.

이런 미약한 신화소를 근거로 알평·혁거세·호공이 같은 집단이었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있다. 그것은 복합적인 신라 문화의 바탕에 박의 문화와 신화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문화의 운반자는 호공으로 상징되는 왜인(倭人), 곧 몸집이 왜소한 남방의 도래자였으며 이들은 박·석·김 세 성씨보다 선주민(先住民)이었다는 것.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한 호공이 세 왕권과 깊은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호공의 잃어버린 신화를 통해 얻은 이런 실마리가 역사학계의 호공 해석과는 어긋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호공을 다시 봐야 고대사의 가려진 세부가 드러나고,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가 좀더 풀리지 않을까? 이것이 아직 다 풀리지 않은 호공의 수수께끼가 지금 우리에게 타전하는 메시지다.

조현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mytos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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