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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30 17:01 수정 : 2005.01.30 17:01



⑤ 광화문

왕자의난·중종반정 지켜보고
왜란때 불타버려 재건 시련
일제 헐릴 위기서 구사일생
한국전쟁땐 폭격 맞아
박정권 어이없는 철근 복원

최근 현판 논란처럼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은 옛부터 정치적 사건과 불가분의 인연을 맺었다. 문 밖이 정치, 행정의 중심인 육조거리와 종로로 이어지는 장소적 특성 탓에 이 겹처마 2층 다락집은 숱한 정변의 무대가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다.

실학자 이긍익(1736 ~ 1806)의 사서 <연려실기술>은 광화문의 드센 터기운이 역사적 뿌리가 깊다는 것을 증언한다.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 왕자의 난 때 궁궐에 들어오라는 반대파 정도전과 이복형제 방석의 계책을 피해 말을 세우고 천명을 기다렸던 곳, 연산군을 쫓아낸 중종반정의 주역 박원종 등이 부채 휘두르며 반군의 진을 쳤던 길목이 광화문이다. 중종이 개혁파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 기묘사화 때는 유생 1000여 명이 문 앞에 모여 눈물시위로 무고를 호소하기도 했다.

광화문은 태조 이성계가 1395년 경복궁을 지을 때 남쪽문이란 뜻의 ‘오문’으로 세워진 뒤 세종 때 지금 이름으로 바뀐다. 광화문이란 이름의 유래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광화문 개칭 당시 ‘세종실록’에는 뜻이나 고친 유래에 대한 기록이 없다. 궁궐문화 연구자인 홍순민 명지대 교수는 “태평성대를 뜻하는 ‘광천화일(光天化日)’, <위서>의 ‘덕화(德化:덕으로 교화시킴)’, 빛 퍼지듯 나라의 덕이 세상에 널리 미친다는 뜻의 <서경>구절인 ‘광피사표화급만방(光被四表化及萬方)’등에서 따왔다는 설이 엇갈리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고 말한다.

조선초 광화문 일대는 궁정·선비문화의 중심지였다. 섣달 귀신 쫓는 의식이 볼거리로 펼쳐졌으며 임금이 누각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광장에서 과거시험도 열렸다. 급제자들은 홍예문(아치문)을 통해 궁궐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다. 또 육조거리 관청 숙직자들이 일은 안하고 기생과 문 앞에서 밤새도록 술마시며 놀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광화문 안에는 중국 황제 칙서를 관리하는 괴원(숭문원)도 있었는데, 박봉에 업무가 까다로와 기피부서로 꼽혔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에는 괴원 근무의 고충을 털어놓은 관리관 윤인함의 한시가 전한다. ‘과거 오른 지 3년이나 되었건만 / 아직 낮은 벼슬을 면치 못하네/ 맨날 까닭 없는 꾸지람만 듣고 /입 있어도 굶주림은 견디기 어렵네 ’.

임진왜란 때 불타고 200년 이상 폐허였다가 1867년 중건으로 다시 등장한 광화문 앞에는 더욱 엄혹한 세월이 기다렸다. 국권을 침탈한 일제는 1925년 총독부를 지으면서 광화문을 근정전 앞문 흥례문과 함께 헐기로 한다. 그때 정론직필로 보존을 주장한 일본인이 바로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다. 22년 9월호 일본 <개조>지에 실린 ‘없어질 처지의 한 조선건축을 위하여’라는 그의 글을 보자.


“…광화문이여, 네 목숨이 경각에 달렸구나…비정한 끌과 무정한 망치가 네 몸을 조금씩 파괴하기 시작할 날이 멀지 않았다…그러나 아무도 너를 구할 수는 없다…지상에서 네 모습을 볼 수 없게 될 지라도 이 글은 적어도 지상 어느 곳엔가에는 전파될 것이다…광화문이여, 사랑하는 친구여!…”이 명문 덕분에 보존여론이 일어 광화문은 궁 동북쪽 건춘문 윗쪽자리(현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쫓겨가지만 목숨은 부지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석축 위 문루가 타버리고 68년 복원 때 석축 자재들은 조각난 채 콘크리트 자재와 뒤섞이게 된다. 그 공사의 장본인이 바로 독재자 박정희다. 그가 68년 복원을 결행한데는 한 중견 건축가의 건의가 뒷받침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건축가는 자랑스러웠던지 이런 회고담을 남겼다.

“…국내 목조 문화재는 변란 때마다 소실되었고, 석조만 남지않았는가? 자재 일절을 불연재의 철근 콘크리트로 해보자고 건의하였다. 몇번이고 시작품을 만들어 현판 이외에 전부 철제(자재)와 철근, 콘크리트로 해서 단청을 입히는 데 성공한 것이다. ”

‘차라리 한채의 소슬한 종교’라고 시인 서정주는 시 ‘광화문’에서 우러렀지만 광화문이 겪은 오욕의 상처는 너무 깊다. 아니, 지금 현판논란처럼 그 시련의 역사는 여전히 건물 주위를 유령처럼 맴돌고 있지 않은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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