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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30 17:22 수정 : 2005.01.30 17:22

문화재청, 사료 수집중 ‘영건일기’ 발견
“경복궁 훈련대장 임태영이 썼다” 기록
신빙성 높아 ‘정학교 서체’ 통설 바뀔수도

‘말많고 탈많은’ 광화문 현판의 원래 글씨는 어떤 모양새이고, 글쓴이는 누구였을까? 광화문 현판 교체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한국전쟁 때 건물과 함께 불탔다는 원래 현판의 실체에 관심이 쏠린다. 그 현판 글씨체만 밝혀지면 복원의 결정적 근거가 되므로 지금 논란도 더이상 필요 없을 것이다.

아쉽게도 현판 원본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다. 옛 문헌 등을 보면 광화문은 조선 태조의 경복궁 창건 초창기부터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전각이 불 타 버린데다 현판 관련기록도 전혀 없어 초창기 현판을 누가 짓고 어떤 글씨체로 썼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관심의 초점은 1865~1867년 경복궁 중건 당시 세운 광화문 현판 글씨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최근 현판 자료를 수집하던 중 흥미로운 기록을 찾아냈다. 현판을 쓴 이가 학계에 그동안 알려졌던 조선 말 서화가 몽인 정학교(1832~1914)가 아니라 경복궁 훈련대장이던 무관 임태영(?~?)임을 알려주는 공사일지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 19세기 경복궁 중건 때 광화문 현판을 무관 임태영이 썼다고 기록한 <경복궁 영건일기>의 일부분. 줄로 싸인 부분에 ‘광화문 현판 서사관 임태영’이란 글자가 뚜렷이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영건일지>에는 임태영이 ‘광화문 현판 서사관(書寫官)’으로 표기되어 있다. 서사관이란 글씨를 쓰는 임시직을 뜻한다. 그의 이름은 ‘함원전’ ‘천추전’ ‘영추문’ 등 주요 전각 현판을 쓴 다른 서사관 이름들과 함께 적혀있다. 임태영은 본관이 풍천으로 좌우 포도대장, 어영대장 등을 지낸 고위급 무관이다. 경복궁 중건 때 공사 감독기구인 영건도감의 제조를 겸직했다고 기록에 전하나 구체적인 생애에 대해서는 역시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동안 역사학계에서는 현판의 원래 글씨는 괴석(기이한 돌) 그림과 글씨의 대가였던 정학교의 것으로 생각해왔다. 근대기 서화가인 위창 오세창(1864~1953)이 고금 서화가들의 일대기와 작품 품평 기록 등을 요약한 <근역서화징>에서 정학교가 광화문 편액을 썼다고 기록한 데 따른 것이었다. 문화재청쪽은 “공식기록인만큼 서사관 기록이 틀렸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학교보다 후대에 태어난 오세창이 잘못 기록했을 공산이 크다”고 밝혔다. 고문서 연구자 김영복씨도 “경복궁 중건시기인 1865~1867년 정학교가 30대 초반인데 그런 대작 현판을 썼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며 “ 영건일지의 기록이 신빙성이 높아 광화문 현판 원작자에 대한 통설은 바뀌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고 말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구한말과 일제기에 광화문을 찍은 사진이 제법 있는데도 현판글씨가 확인된 경우는 없다는 점이다. 당시 광화문 사진은 일제시대 때 찍은 유리원판본 등을 포함해 40여 점이 남아있는데, 근접사진에서도 현판 부분은 대개 시커멓게 처리되어 글씨가 나타나지 않는다. 문화재청쪽도 <조선고적도보> 등 관련 사진들을 수소문했으나 현판 윤곽 외에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학연구소의 전우용 연구원은 “현판의 검은 바탕에 흰색 아닌 붉은 색 계통으로 글씨를 쓴 것 같다. 이럴 경우 흑백사진에는 제대로 현상되지 않아 컬러나 매우 가까운 근접사진이 아니면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게 된다”고 추정했다.

정황들을 종합한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글씨체가 확인되는 광화문의 원본 현판글씨 사진 혹은 최소한 집자할 수 있는 임태영의 다른 글씨를 찾아내는 것이 현판논란을 확실하게 마무리짓는 또다른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학계의 한 관계자는 “현판 교체 논란이 정쟁거리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문화재 당국과 학계가 광화문 현판 사료 추적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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