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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의미라는 것을 이렇게 배운다. 이토록 빈약하고 맥 빠진 방식으로. 무미건조한 거울 놀이를 통해서. 그래서 우리는 사물들을 기호들로 대체하는 법을 배우고, 사물들과의 직접 만남보다는 기호들의 조작을 더 선호하게 되며, 기호계(記號系) 속에, 기호들의 체계 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아예 문화를 살아가는 존재로서, ‘인간’으로서 존립할 수조차 없다. 일정한 기호계 바깥으로 버려진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폴리스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로 정의했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이런 기호체계 속에서 살아간다. 어머니의 품을 떠나 사회 속에 들어가고 하나의 인간, 하나의 주체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곧 기호의 세계로 들어온다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기호체계는 마치 자연법칙처럼 애초에 주어진 그 무엇으로서 다가온다. 고양이가 ‘개’로 불리고 개가 ‘고양이’로 불리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것으로 느껴진다. ■ 낡은 기호체계 뚫고 ‘의미’ 로 그러나 기호의 체계는 자의적이다. 지금 ‘고양이’로 불리는 것이 ‘개’로 불리고 ‘개’로 불리는 것이 ‘고양이’로 불려서는 안 될 뾰족한 이유는 없다. 개-고양이이든 고양이-개이든 둘이 구분되면 된다. 현대 사상에서 사용하는 중요한 용어로 다시 말한다면, 둘이 ‘변별(辨別)’되면 되는 것이다. 기호들의 체계란 이렇게 자의적인 체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호들의 체계가 자의적이라는 것이 기호들이 세계 없이도, 사물들 없이도 존재하는 자족적인, 자폐적인 체계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기호 하나하나는 자의적일지라도 기호 전체는 사물들 없이는 의미를 상실하는, 세계를 전제해서만 존립하는 전체이다. 이 때문에 기존의 기호체계의 자의성과 빈약함에 처음으로 눈뜰 때가 우리가 ‘의미’라는 것을 새롭게 생각하게 될 때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기호체계의 한계에 부딪쳐서 ‘의미’라는 존재에 처음으로 맞닥뜨릴 때, 의미에 눈뜨고 새로운 눈으로 그것과 마주 서게 되었을 때, 의미라는 이 기이한 존재, 모든 문화적 활동, 인간적 활동의 밑바탕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 의미라는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인간은 자신을 존립시켜 주던 문화 전체, 사회 전체에 근본적인 새로운 시선을 던지게 된다. 바로 이 순간이 한 사람의 인간이 ‘사유’하게 되는 순간이다. 사유는 단순한 배움이나 정보획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문화적 향유의 밑바탕에서 작동하고 있는 의미라는 존재를 의식하게 될 때 탄생한다. 따라서 사유는 반드시 고급한 사상가들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는 똑같은 하나의 사물이 두 개의 기호로 지시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혼란을 느낀다. 의미라는 존재에 맞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기호들의 작동 방식, 의미가 산출되는 과정, 사물과 기호의 관계, 기호체계의 자의성 … 등에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문화의 근거인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은 곧 사유하는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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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눈길을 던지고 체험들을 통해 새 기호(의미)를 창작해낸다
이러한 활동들은 철학적 문제를 야기한다
이런 문제들은 존재론으로 흘러들어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고 그로부터 세계에 대한 새로운 사유들이 창출된다
의미가 있는 그곳에 문화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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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예술은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고 또 새롭게 창조해내는 대표적인 활동들이다. 과학은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서 새로운 경험들을 계속 산출해낸다. 파스칼의 등산 경험은 ‘대기압’ 개념을 낳았고, 흑체(黑體)에 대한 새로운 경험은 양자역학을 낳았다. 과학자들은 평소에는 과학사적으로 이미 형성되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기호체계를 가지고서 사유하지만, 새로운 경험을 만났을 때 기존의 기호체계를 변경시킬 필요를 느끼게 된다. 새로운 경험은 더 이상 기존의 그물=기호체계로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은 초기에 여전히 입자 개념으로 사유했다. 즉 아주 작다는 점에서 다를 뿐 우리가 거시적으로 만나는 물체들 같은 속성을 띤 입자들을 사유하고자 했다. 그러나 연구가 진행되면서 발견하게 된 것은 ‘입자’라는 개념 자체의 한계였다. 물질과 파동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상황, 공간적으로 정확히 마름질된 입자들을 발견하기 힘든 상황, 때문에 입자의 ‘위치’라는 개념 자체가 흔들리게 되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에르빈 슈뢰딩거는 천재적인 직관으로 ‘파동 방정식’을 발견했으며, 그 후 미시세계는 이 방정식에 비추어 확률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물리세계와 기호계 사이의 관계가 크게 변한 것이다. ■ 과학·예술은 새로운 의미찾기 현대 예술가들의 노력 또한 기존의 기호체계를 벗어던지고 사물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표상하는 각종의 성과들을 산출해 왔다. 재현의 회화에서 화가들은 사물들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 노력했으나, 현대의 화가들은 사물들이 내포하는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들을 포착하려 노력했고 그 결과 다채로운 새로운 회화들을 창조해내기에 이른다. 회화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기호체계라 할 때, 사물들과 기호체계가 맺는 관계는 현대 회화를 통해서 크게 변한 것이다. 칸딘스키는 현대 추상회화를 만들어내면서 사물들과 회화적 기호들 사이의 관련성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사유했다. 칸딘스키는 선과 색을 비롯한 회화적 기호들에 일의적인 의미들을 부여하고자 했다. 이러한 작업은 사물들과 기호들의 관계를 새롭게 그려 나가려는 집요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추상회화를 통해서 현대인들은 사물들을 새롭게 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과학과 예술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체계에 새로운 눈길을 던지고, 독특한 체험들을 통해서 새로운 기호들을 창작해낸다. 이러한 활동들은 세계/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 세계를 분절(分節)해 바라보는 다채로운 방식들, 사물과 언어의 관계, 세계 내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상 등을 비롯해 갖가지의 철학적 문제들을 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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