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10 11:11
수정 : 2019.03.10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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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0월 ‘60년미술협회’ 동인들이 덕수궁 북쪽 벽에서 열었던 ‘벽전’의 전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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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
‘도로 확장’ 권력의 공간 농단에
원래 담장 자리 사라져 고증 난점
고종의 장례 이전과 이후 일어난
정치·문화적 역사 포괄하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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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0월 ‘60년미술협회’ 동인들이 덕수궁 북쪽 벽에서 열었던 ‘벽전’의 전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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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이로써 역대 조선왕조의 군주는 명맥이 끊겼다. 즉 우리 대한제국의 역사는 이로써 종결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신기원, 신의미가 태어나는 것이다. ”
극작가 김우진(1897~1926)은 1919년 1월28일 일기에 썼다. 고종황제가 일주일 전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느낀 감회를 한달음에 적어내려간 것이다. 조선 땅에서 역사의 새로운 의미가, 대한제국을 대체할 새로운 독립국가의 싹이 움트고 있다는 것을 20대의 그는 실감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불과 7년 뒤인 1926년 김우진은 식민지 현실 앞에서 실의에 빠져 애인이던 가수 윤심덕과 배 위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생을 등지고 만다.
흔히 덕수궁 돌담길로 불리는 덕수궁 담장은 김우진이 적었던 신기원의 의미가 삐어져나온 현실 공간이었다. 3·1운동은 바로 그 담벼락을 타고 번져나간 고종의 승하 소식과 이를 애도하는 전국각지의 민중이 담벼락 쪽으로 운집하면서 확산되어갔다. 담장은 대한문을 기점으로 북쪽과 서쪽으로 각각 펼쳐지면서 쪼그라진 덕수궁을 둘레 1.1km의 길이로 감싼다. 전형적인 궁장(墻)의 모습이지만 그 담벼락 아래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대한제국과 식민지조선, 대한민국을 격동시킨 전대미문의 역사였다. 구한말 민중집회인 만민공동회부터 고종의 인산, 3·1운동 시위, 4·19혁명, 6월항쟁과 이한열의 장례, 2009~1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와 쌍용차해고노동자의 농성, 그리고 태극기부대 극우단체의 집회까지 무수한 주장과 투쟁의 몸짓이 잇따라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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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성당과 맞닿은 덕수궁 북쪽 담장의 흰천 설치물 앞에서 경계를 서고있는 전경들. 지난 1일 삼일절 100주년 기념대행진이 펼쳐진 오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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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은 3·1절 100돌을 기념해 낯선 공간예술 작업(2월25일~3월5일)을 벌였다. 태평로를 면한 덕수궁 담장 동쪽과 대한문 안쪽 골목 남서쪽 600여m를 대나무 틀대에 묶여 펄럭거리는 하얀 천으로 가렸다. 올해로 서거 100주년을 맞는 고종의 국장을 예술적인 맥락에서 재현해보겠다는 취지였다. 당시 고종의 국장이 일본식 장례로 변질돼 치러졌기 때문에 우리 식으로 망자에 대한 예의를 표해보려했다는 게 서울시 쪽의 설명이다.
3월1일 낮 흰 천을 두른 덕수궁 돌담길 주변은 혼란스러웠다. 서울시의 100주년 기념 태극기 행진과 독립가·애국가 대합창과 애국보수단체의 문재인 정권 처단을 주장하는 태극기 시위가 한데 뒤섞이면서 기괴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성조기, 태극기를 든 노인들이 흰 천이 나붙은 대한문 앞 담벼락을 지나가다가 독립행진에 나선 진보단체 회원들과 욕설을 하며 말다툼을 했다. 흰 천 담벼락이 시작되는 곳에는 태극기 시위 기념품을 파는 즉석 노점이 생겼다. 대한문 안쪽의 돌담벽에는 흰 천을 배경으로 외국인 거리 가수가 팝송을 불렀고, 조금 더 들어가니 행인들이 근대 복식을 입고 당시 만세운동을 재현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성공회 성당 부근의 북쪽 벽엔 전경들이 늘어서서 혹시나 모를 시위대끼리의 충돌에 대비중이었다.
흰 천을 친 덕수궁 돌담은 대부분 원형을 상실해버린 후대의 건조물이다. 1912~14년 광화문 사거리 황토현 고개를 깎아 태평로 큰길을 닦으면서 덕수궁 동쪽 담은 이미 잘라져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3·1운동 때도 이미 원형을 상실한 상태였다.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문화재전문가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동쪽벽을 아예 허물어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철망담으로 바꾸었고, 태평로를 확장해 담의 위치도 6m나 뒤로 물린다. 1969년 서울시는 도로확장을 이유로 16m나 다시 후퇴시킨다. 이 과정에서 대한문은 도로 가운데 섬처럼 남아있다가 결국 원 위치에서 27m이상 서쪽으로 밀려났다. 그러니까 현재 덕수궁 돌담길은 역대 권력에 의해 공간적으로 농단당한 흔적인 셈이다.
공간의 관점에서 볼때 흰 천 퍼포먼스는 실패했다. 원래의 담장 자리가 사라진 고증상의 난점도 있지만, 담벼락에서 고종의 장례 이전과 이후 일어난 정치적, 문화적 맥락의 역사를 제대로 포괄하지 못했다. 1898년 덕수궁 옛 정문 인화문과 대한문 부근에서 보름 가까이 철야 시위를 벌이며 의회 설치와 내정개혁을 줄기차게 요구했던 만민공동회의 열기를 아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1960년대 국전 위주의 답담한 미술정치에 넌더리를 내며 덕수궁 북쪽과 정동고개의 돌담에 그림을 내걸었던 벽전 작가들의 도전정신을 기억하는 이 얼마나 될까. 역사문제연구소의 창설주역인 박원순 시장도 이런 의문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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