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07 18:26
수정 : 2019.08.08 12:06
|
지난달 토탈미술관 수장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흰개미의 종이 부조 작품. 흰개미 떼가 보관된 200장의 판화지 사이로 기어들어가 오랫동안 종이쪽을 파먹으면서 마치 굴곡진 계곡 같은 이미지의 페이퍼아트 작품이 만들어졌다.
|
정교한 ‘협곡’ 넘실대는 작품
평창동 토탈미술관 수장고서
30년 쌓아놓은 판화지 더미에
흰개미떼가 만든 ‘페이퍼아트’
|
지난달 토탈미술관 수장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흰개미의 종이 부조 작품. 흰개미 떼가 보관된 200장의 판화지 사이로 기어들어가 오랫동안 종이쪽을 파먹으면서 마치 굴곡진 계곡 같은 이미지의 페이퍼아트 작품이 만들어졌다.
|
“엉, 이건 또 무슨 작품이래?”
지난달 17일 서울 평창동 토탈미술관 1층 수장고에서는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먼지 쌓인 소장품들을 직원들과 정리하던 노준의(73) 관장은 바닥 한쪽에 30년째 놓아뒀던 판화지 상자를 들춰봤다가 깜짝 놀랐다. 세로 78㎝, 가로 54㎝의 판화용 이절지 위에 정교한 협곡이 그물처럼 여기저기 파여 별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흰개미 떼가 200장 겹쳐 쌓은 판화지 더미 속을 여기저기 파먹고 집을 지으면서 일종의 페이퍼아트(종이 부조)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개미 예술’의 진풍경에 미술관 사람들은 한동안 넋을 잃었다고 한다. 노 관장은 떠올렸다. “종이 위에 카파도키아나 그랜드캐니언이 펼쳐진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한없이 신비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징그럽기도 하고….”
|
6일 낮 서울 평창동 토탈미술관 앞마당에 흰개미가 파먹은 판화지 부조 작품을 내놓은 노준의 관장(오른쪽)이 ‘작품’을 가리키며 웃고 있다.
|
6일 토탈미술관을 찾아갔더니 노 관장은 문제의 개미 작품을 미술관 앞마당에 내놓고 말리고 있었다. 개미들의 작품 무대인 판화지는 1990년대 초 노 관장의 남편인 문신규(81) 건축가가 미국 뉴욕을 여행할 때 구입한 것이다. 당시 그림과 드로잉 작업에 몰두해 있던 노 관장에게 주려고 했던 것인데, 막상 종이를 받자 그리겠다는 욕구가 사라져 수장고에 30년 가까이 있었다고 한다.
1992년 개관한 토탈미술관에는 지상과 지하층 통틀어 3개의 창고와 2개의 수장고가 있다. 1970년대 말부터 수집해온 400점이 넘는 국내외 작가들 컬렉션과 물품들이 최근 내부를 가득 채워 관리운영이 난감한 상황에 이르자 지난달부터 작품을 꺼내 청소,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개미 예술’뿐 아니라 일부 컬렉션도 오랜만에 바깥세상에 나왔다. 1990년대 초 토탈미술상을 받은 임옥상 작가가 만든 흙판 그림 <어머니>, 이기봉 작가의 초창기 스티로폼 이미지 작업,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강영순 작가의 90년대 초 반구상 작업 등이다. 노 관장은 “작가, 애호가, 비평가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색다른 문화를 만들어냈던 토탈미술관 특유의 분위기를 담은 작품들이다. 올가을께 새로 꺼낸 컬렉션들을 모아 기획전을 해볼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