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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19 20:55 수정 : 2019.08.20 01:43

순천왜성의 일부 모습. 입구의 해자(사진 위쪽 울타리 너머 우묵한 곳)와 문터 성벽 사이를 답사객들이 걸어가고 있다. 1963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가 1999년 전남유형문화재로 격하됐다.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정유재란 최후 결전터 순천왜성
400여년 전 조선 재침한 왜군들
들머리 해자·성벽 견고하게 쌓아
영구주둔 통치 노렸던 기반 시설
유물 발굴 작업없이 부실 복원

순천왜성의 일부 모습. 입구의 해자(사진 위쪽 울타리 너머 우묵한 곳)와 문터 성벽 사이를 답사객들이 걸어가고 있다. 1963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가 1999년 전남유형문화재로 격하됐다.
한반도에도 ‘북아일랜드’ 같은 땅이 생길 뻔했다고 한다. 귀가 쫑긋해졌다. 지난달 중순, 답사하러 간 전남 순천시 해룡면 순천왜성에서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는 섬한 가정을 들려주었다. “16세기 일본 지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계자만 확실히 정하고 죽었어도 왜군은 물러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선 이 땅은 지금까지 일본 영토로 남아 있을지도 몰라요. 지금의 영국령 북아일랜드 같은 일본 땅이 한반도에 수백년 건재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오싹하지 않나요?”

빈말이 아니다. 순천왜성 유적들의 면면과 왜성을 둘러싼 400여년 전 전란의 역사를 면밀히 들여다본 전문가들이라면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다. 1592~1593년의 임진왜란에 이어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재침한 왜군은 남해안의 전라·경상도 해안 일대 수십 군데에 견고한 왜성을 쌓았다. 이들은 부산포를 중심으로 왜성들 사이에 탄탄한 물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왜성끼리는 물론이고 일본 본토와도 군량과 무기를 보내는 보급 순환 시스템을 만들었다. 지역 통치망도 구축해 주민들한테 세금을 거두고 부역시키는 등 직접지배 정책을 폈다. 히데요시는 한반도 남부 왜성에 6만여명의 주둔군을 당번처럼 본토 병력과 교대시키면서 대공세를 준비하다가, 1598년 8월 갑작스럽게 죽었다. 곧이어 측근 중신들이 전면 철수 결정을 내린다. 어린 아들 히데요리가 집권했으나 영주들의 권력투쟁으로 후계구도가 불투명해지자 전쟁을 계속 치를 상황이 못 되었던 것이다. 왜군을 강토에서 단독으로 몰아낼 힘이 딸렸던 조선으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순천왜성 천수대 터(아래 주춧돌 있는 부분)에서 남동쪽을 조망한 풍경. 멀리 광양만과 매립지 위에 들어선 율촌산업단지가 보인다. 오른쪽 상단 산업단지 위쪽의 작은 동산처럼 보이는 부분이 노루섬(장도). 이 섬에서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왜성을 치기위한 협공작전을 펼쳤다.
지금도 요새같이 다가오는 순천왜성의 들머리 해자와 문터, 성벽, 천수각 등의 흔적을 보면서 영구주둔에 대한 당시 왜인들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왜성은 시내 해룡면 율촌산단지 매립지 안쪽에 작은 야산처럼 돌출해 있다. 이 왜성 언저리에서 1598년 9~11월 정유재란의 마지막 결전이 벌어졌다. 성안을 지키던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본국의 철수명령에 따라 거제도, 부산포를 거쳐 일본으로 빠져나가려다 포위한 조선 명나라 연합군과 맞붙은 것이다. 이 싸움은 성웅 이순신이 장렬하게 전사한 노량해전의 전초전으로도 유명하다. 고립된 고니시 군의 탈출을 도우러 왜 수군들이 남해섬 노량해협으로 몰려오면서 해전이 발발한 까닭이다.

서쪽 검단산성 쪽에서 동쪽으로 틀어 들어온 왜성 진입로는 우묵한 해자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 왜성 자체는 철옹성을 자랑했던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처럼 삼면이 바다이고, 북쪽만 육지와 연결된 반도였는데, 그마저도 해자를 파서 차단하고 나무다리만 둘러 통하도록 한 뒤 그 앞쪽에 여러 겹의 목책을 구축했다. 섬이 된 왜성은 높이 5m의 두 겹짜리 본성곽 안에 높이 4m짜리 내성곽을 두 겹으로 둘렀다. 조명 연합군이 이중목책을 앞세운 외성을 넘고 해자를 건너 내성곽에 침입하더라도 진입 동선이 지그재그식으로 되어 있어 성곽 위 왜병의 협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복잡하고 치밀한 얼개를 만들어놓았다. 비스듬한 호를 그리는 문터와 잔존 성벽의 돌 부재들은 지금도 짜임새가 촘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처럼 단단한 방비시설을 갖춰놓고 갖은 전투로 단련된 1만여병의 왜병들이 죽기살기로 저항한 까닭에, 순천왜성 결전은 4만명 이상의 조명연합군이 두달 가까운 기간동안 공격을 퍼부었지만,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고 만다.

순천 검단산성에서 종종 발견되는 석환(동그란 돌멩이). 순천왜성을 내려다보는 서쪽 능선에 자리한 검단산성은 정유재란 당시 조선, 명나라 연합군이 진을 치고 왜성의 왜군과 대치했던 곳이다. 석환은 당시 조·명 연합군이 썼던 무기로 추정된다.
검단산성에서 나온 백제 기와조각들. 원래 6~7세기 백제인들이 쌓은 산성으로 격자와 새끼줄 무늬가 있는 백제 기와들이 다수 확인된다.
고니시의 왜군들은 접전 끝에 성을 떠나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결국 돌아갔지만, 성터의 반듯하고 탄탄한 기반시설들은 애초 그들이 조선 남부의 영구통치를 노리고 들어와 지은 것임을 분명하게 일러준다. 조선을 침공한 왜장들은 8세기 <일본서기>에 3세기 진구왕후의 삼한 정벌 이래 조선반도에 임나일본부가 세워졌다는 허구적 설화가 기록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헛된 기록을 근거 삼아 조선반도 남반부는 원래 일본 고토였으니 수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왜곡된 욕망이 당시 왜성을 쌓을 때도 꿈틀거렸을 것이다. 이 욕망이 지금도 일본에서 극우인사들뿐 아니라 정관계 지배세력의 머릿 속을 사라지지 않은 채 맴돌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그런데도 왜성의 심연에 깃든 이런 역사적 맥락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울산, 사천, 순천 등지의 유적들은 무시되거나 부실하게 복원되고 있는 실정이다. 순천왜성만 해도 수년 전 지자체가 성곽 일대를 유적공원화하면서 격전의 흔적이 남아 있었을 해자를 제대로 발굴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파서 준설해버린 사실이 현지인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해자 속에 무기들과 함께 파묻혔을 조선과 명, 일본 병사들의 유해와 그들의 넋을 생각하니 허망한 감회가 몰려왔다. 순천/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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