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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26 11:21 수정 : 2019.08.26 20:54

아라가야 왕성터로 지목되는 가야리 유적 전경. 위쪽에 나무목책 흔적이 열을 지어 있고 그 아래 건물터가 흩어진 모습들이 보인다.

함안 가야리 유적 국가사적 지정예고
판축토성과 고상가옥터, 무기류 눈길
5~6세기 아라가야 중심왕성터 추정

아라가야 왕성터로 지목되는 가야리 유적 전경. 위쪽에 나무목책 흔적이 열을 지어 있고 그 아래 건물터가 흩어진 모습들이 보인다.
5~6세기 융성했던 가야 소국 아라가야의 중심 왕성터로 추정되어온 경남 함안 가야리 유적이 국가사적이 된다. 문화재청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진행중인 가야리 유적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예고했다고 26일 발표했다. 이 유적은 가야읍을 가로지르는 신음천과 광정천이 합쳐지는 지점에 솟은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는데, 주위가 중대형 가야계 고분군들에 둘러싸인데다 조선시대 고을 기록인 <함주지>, <동국여지지>, 일제강점기 고적조사보고 등에서 ‘아라가야 중심지’로 지목한 기록이 전해져 일찍부터 최고지배자의 거소란 추정이 제기됐던 곳이다.

토성의 서벽 단면. 흙을 시루떡처럼 켜켜이 다져 쌓는 판축기법의 흔적이 보인다. 가야권 유적에서는 처음 확인되는 사례다.
실제로 지난해 4월 토성벽의 일부가 확인되면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시굴과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이런 설을 뒷받침하는 유적들이 다수 드러났다. 해발 45~54m의 구릉 부분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쌓은 토성과 나무울타리(목책), 대규모 고상건물(1층 부분을 틔우고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바닥을 둔 건물)의 흔적 등이 확인된 것이다. 건물터 안에서 쇠화살촉과 작은 칼, 쇠도끼, 비늘갑옷(찰갑) 등이 출토되면서 5~6세기 군사적 성격을 가진 대규모 토성으로 조성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올해 3월부터 시작한 성벽부 정밀조사에서는 흙을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아 성벽의 강도를 키우는 판축기법의 흔적들이 가야문화권에서는 처음 확인되기도 했다. 연구소 쪽은 “김해 봉황동 등 비슷한 성격의 가야권 다른 유적들과 비교할 때 상태가 매우 온전하고 주변 유적과 연계된 경관도 잘 보존된 편”이라며 “고대 가야 중심지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야사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북쪽에서 본 가야리 유적 전경.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예고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사적 지정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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