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06 17:02
수정 : 2005.02.06 17:02
⑥ 금강산 구룡연
강원도 금강산은 우리 민족사에서 자연유산이라기보다 문화유산에 가깝다. 조선 후기 조속, 겸재 정선 등이 우리 산하의 기운을 찍어내듯 추려 표현하는 진경회화의 모태로 삼은 곳이 이 산이었다. 김창흡, 이병연 등 숱한 문인들의 풍경시, 세조대왕, 율곡 이이, 월사 이정구 등의 유명한 유람기도 여기서 나왔다. 중국도 따르지 못할 천하제일 명산을 지녔다는 선인들의 자부심은 이렇듯 대단한 것이었다.
숱한 문인·화가들 붓들어 예찬
64척 ‘미륵불’ 새김글씨
명산 4000여곳 ‘방명록’ 새겨
들리는가 구룡의 탄식소리
분단은 이 산의 탐승로에도 얄궂은 파장을 남겼다. 옛 선인들은 철원, 회양, 단발령을 거쳐 내금강 중심으로 탐승했고 기록도 압도적으로 내금강이 많다. 하지만 금강산 관광이 재개된 지금 남녘 사람들은 명문의 산실 내금강을 못 보고, 동해 쪽에서 외금강 일부밖에 볼 수 없다. 분단이 탐승경로조차 바꿔 버린 것이다.
외금강 중 선인들 입에 오르내렸던 명승은 단연 구룡폭포와 구룡연이다. 외금강 신계사에서 시작해 세존봉과 옥녀봉 자락을 끼고 들어가는 옥류동 계곡 끝에 있는, 최고 높이 100m의 험악한 석벽에서 내리꽂듯 흘러내리는 74m 높이의 폭포와 그 아래위의 아홉 연못들은 숱한 문인과 화가들의 상상력을 당겼다. 1928년 나온 금강산 시·유람집 모음인 〈금강승람〉편을 보면 구룡연에 대한 다기한 묘사들이 쏟아진다. 조선 후기의 대문장가인 삼연 김창흡은 아홉 마리 용이 깃든 연못을 아홉 연짜리 ‘구룡연 9수’로 읊었다. 초연에서 맑기가 거울 열어놓은 것 같다고 운을 뗀 뒤 3연에서 거뭇하고 푸른 연못 물색이 너무 깊어 신기한데도 가까이 못 가니 안타깝다고 했다가 9연에서는 물속 잠룡이 몸을 쉬이 드러낼 것 같다며 환희에 떨었다. 고종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은 “폭포 흐르는 암반 위의 모습은 가운데가 쏙 들어간 것이 마치 말 귀와 같아 폭포가 흘러 떨어지는 것이 말의 두 귀 사이에서 물이 흘러 떨어지는 것 같다” “둥근 못에 절구 찧는 것 같다”고도 했다. 화인들 사이에서도 단원과 겸재는 거장답게 구룡폭포도를 남겼고, 광기의 화가 최북은 그림도 성이 안 찼던지 구룡연에 직접 뛰어드는 자살 퍼포먼스까지 벌였다. 〈금강예찬〉이란 명기행문을 남긴 육당 최남선도 “(폭포)소리를 뒤쫓아 몸뚱이 나온다! 귀는 터진 대로 먹어 버리고, 눈은 뜬 대로 멀고, 얼은 말짱한 채 빠져 버리고…나도 모르게 하느님 하고 예배했다”고 고백했다.
겨울에 찾아간 구룡폭포는 굉음을 멈춘 채 단단히 얼어붙은데다 거뭇한 석벽들도 허연 눈을 잔뜩 이고 있어 그런 환희를 체감할 수 없었다. 단 폭포 오른쪽 석벽에 근대 서화가 해강 김규진이 금강산 불교도들의 부탁을 받고 새긴 길이 64척짜리 ‘미륵불(彌勒佛)’ 새김글자가 더욱 위용을 자랑한다. 일제시기 숱한 현판과 각서를 남겼으며 고암 이응노의 스승이기도 한 이 대서화가의 글씨는 영하 20도를 넘는 혹한의 구룡폭 공간에 더욱 지엄한 신비감을 흩뿌린다. 하지만 금강문, 옥류동을 거쳐 구룡폭까지 조선~일제 때 숱하게 새겨진 탐승객 이름과 명승이름 글씨를 접하며 올라온 탐승객들은 이 새김글씨 앞에서 묘한 상념에 빠질 법도 하다. 북한 당국이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찬양하는 선전구호 등을 역시 눈에 띌 만한 바위와 암벽마다 ‘글발’로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금강산에만 무려 4000곳 넘는다는 이 글발과 옛 선인, 탐승객들이 다닥다닥 새긴 글자들이 금강산의 자연 문화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역사이고 유산이 될 것인가. 통일되면 발라버려야 할 흔적에 불과한 것일까. 춘원 이광수는 〈금강산 유기〉에서 구룡연 암벽에 글씨 새긴 김규진을 대죄를 범했다고 꾸짖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 생각은 또 다른 듯하다. 옛적 금강산을 탐승했던 문인들 또한 마구 바위에 글 새기는 행태에 혀를 차기는 했다. 19세기 훈장 출신으로 〈동행산수기〉라는 걸작 탐승기를 남긴 어당 이상수는 이렇게 일갈했다. “큰 글자를 새기느라 산의 돌을 무른 대나무처럼 여긴다면 이로움이 있겠는가? 앞사람 이름 깎아 자기 이름 새기는 것은 남의 무덤 허물어 자신을 묻는 것과 같으니….”
금강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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