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의 ‘몰입’- “내가 하는 연기, 스스로 미쳐서 하는 것”
한석규의 ‘음성’-“소리에 좌우되는 분위기, 40년 핀 담배도 끊어”
이병헌의 ‘눈빛’-“짧은 눈빛 위해 긴 시간 혼자 생각”
하정우의 ‘능청’-“허술해 보여도 인간적인, 그런 연기에 매료”
올겨울 극장가는 영화도 영화지만 배우들의 연기 대결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랫동안 한국 영화계를 이끌어온 네 기둥 최민식·한석규·이병헌·하정우가 동시에 출격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의 어제와 오늘을 책임져온 이들이 한꺼번에 맞붙은 상황을 놓고 배우들 스스로도 즐거워하고 있다. 이들 네 배우의 연기와 장기를 열쇳말로 풀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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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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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드 연기 최민식의 ‘몰입’ 최민식은 한국을 대표하는 메소드 연기자다. 배역을 맡는 순간 배우 최민식은 사라지고 오롯이 그 캐릭터만 남는다. <파이란>(2001) 촬영 당시 강재 역에 너무 몰입해 촬영장 밖에서도 삼류 깡패처럼 살았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회자된다. 살인마 역을 맡았던 <악마를 보았다>(2010) 때는 “촬영 당시 엘리베이터에서 친근감을 표시하던 아저씨가 반말을 하자 ‘이 새끼, 왜 반말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살인마의 ‘살’자도 다신 안 하고 싶다”며 후유증을 호소하기도 했다.
어떤 인물이든 그 자체가 돼버리는 연기력 덕에 다양한 스펙트럼의 배역을 소화해왔다. 깡패, 사이코패스, 정치인, 장군, 소시민…. 30년 가까이 한국 영화계의 든든한 기둥으로 버틸 수 있었던 건 철저한 캐릭터 연구 덕이다. <명량>(2014) 때는 이순신 장군을 연구하다 무게감에 짓눌리기도 했다. 당시 그는 “허구 인물을 연기할 땐 상상력을 발휘해 자유롭게 창작하는데, 이분은 실제니까 그게 잘 안됐다. 연기하고 나서도 개운치 않았다. 지금도 확신이 안 서고 자신감이 없다”고 털어놨다. 이런 태도는 되레 주저하고 고뇌하는 이순신으로 표현돼 1700만 관객의 공감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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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 텐트폴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 출연한 최민식.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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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개봉한 <천문>에서 그는 조선시대 천재 과학자 장영실 역을 맡았다. 그는 최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장영실은 빈 공간이 많은 인물이라 좋았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과학자라는 캐릭터를 잡고 상상력을 더해 여백을 채워나갔다”고 말했다. 상상하고 몰입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희열은 그의 원동력이다. “나는 관객에게 잘 보이려고 연기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 미쳐서 하는 거다. 그러면서 사람과 삶에 대해 배운다.”
국내 흥행 1위 주연배우이지만 그는 아직 목마르다. 관객 수가 아니라 다양한 캐릭터에 대한 목마름이다. “관객 수는 포기한 지 오래다. 이젠 좀 유연해지면서 관객에게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멜로, 코미디도 좋고. 뭘 하든 속까지 꽉 차게 해보고 싶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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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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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 꽉 찬 한석규의 ‘음성’ <천문:하늘에 묻다>의 백미는 세종이 폭발하는 장면이다. 신하들에게 호통치는 장면에서 한석규는 나즈막히 내뱉던 목소리를 순식간에 확 끌어올려 내지른다.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는데도 목소리만으로 평화롭던 스크린에 살벌함이 감돈다. 배우 한석규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중저음의 목소리는 배우의 신뢰도를 높인다. 하지만 성우 출신인 한석규에게는 단순히 그런 차원을 넘어선다. 그는 한 작품에서도 목소리 톤과 호흡에 변화를 줘 인물을 살려낸다. <천문>에서 세종은 장영실에 견줘 변화를 줄 여지가 적다. 하지만 그는 소리를 내지르기 전 발동을 걸기 위해 “개새끼”라는 없던 대사를 붙이며 폭발력을 심는 등 목소리로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그는 “소리는 호흡에 뭔가 실어서 보내는 건데, 어떤 호흡 속에서 소리를 얻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연구하면 할수록 어려운 일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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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 텐트폴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 출연한 한석규.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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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잘 내려고 그는 끊임없는 자문자답을 한다. “소리를 내려면 여기(머리) 안에 뭔가 중요한 것이 가득 차야 한다”고 했다. 최근 인터뷰에서 그는 질문 하나에 10분 넘게 답을 했다. <천문> 촬영 현장에서도 신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해 “이놈아 그만 좀 물어봐”라는 핀잔도 들었단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세종을 연기한 적 있는 그는 “그땐 절대 죽이지 말자고 생각하는 인물로, 이번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을까 생각하는 인물로 해석했다”고 말했다. 그 차이가 큰 변화를 만들었다.
중저음의 배우들이 대부분 변신의 폭이 넓지 않은 것에 견줘 그는 <서울의 달>의 제비부터, <8월의 크리스마스>의 평범한 남자, <넘버3>의 조폭까지 다채로운 캐릭터를 소화했다. 선이 굵거나 개성이 뚜렷하지 않은 얼굴인데도 한석규가 연기하면 전혀 다른 인물로 살아난다. 최근엔 목소리를 위해 40년간 피던 담배도 끊었다. “최민식은 끊임없이 뭔가를 활활 태워야 하는 불 같은 사람이라면 나는 모았다 확 뿌려야 하는 물 같은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한석규. 앞으로 그의 목소리는 더 깊어질 듯하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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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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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물느물 하정우의 ‘능청’ 하정우는 현재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우 중 하나다. 지난해 8월 그는 주연작 기준으로 역대 최연소 1억 관객 배우 타이틀을 얻었다. 그에 앞서 1억 관객을 넘긴 배우는 송강호밖에 없다.
출연 영화가 벌써 30편을 넘을 만큼 왕성한 활동 속에 다양한 배역을 소화했지만, 그는 특유의 능청스러운 연기를 할 때 가장 빛을 발한다. 하정우의 존재감을 처음 알린 윤종빈 감독의 대학 졸업작품 <용서받지 못한 자>(2005)부터 그랬다. 느물거리는 말년 병장으로 출연해 신참 이병(윤종빈)을 갈구는 장면은 묘한 웃음을 자아낸다. 이후 <비스티 보이즈>(2008)의 양아치 호스트, <멋진 하루>(2008)의 능글맞은 백수, <러브픽션>(2011)의 찌질한 소설가 등으로 흥행과는 별개로 또렷한 인상을 남겼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2016)에서도 아가씨(김민희)를 유혹하려는 백작을 능청스럽게 연기해 웃음 포인트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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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 텐트폴 영화 <백두산>에 출연한 하정우. 씨제이이엔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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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개봉 7일 만에 400만을 돌파한 <백두산>에서 하정우는 특전사 대위 조인창 역을 맡았다. 카리스마 강한 캐릭터로 북한 특수 요원 리준평(이병헌)과 불꽃 튀는 대결을 펼칠 것으로 예상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의외로 유약하고 느물거리는 캐릭터를 선보였다. 특히 격전 상황에서 겁먹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웃음을 안긴다. 하정우는 “병헌이 형이 다 때려부수는 캐릭터라 나는 일부러 반대되는 캐릭터로 잡았다”고 했다. 두 배우 모두 사는 영리한 선택이다.
그는 묵직함보다 느물느물함을 연기하는 걸 더 좋아한다고 했다. “<그린 북>을 보고 비고 모텐슨에게 처음으로 매력을 느꼈다. 허술해 보이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에서 어마어마한 내공을 느꼈다. 나도 이런 연기를 좋아한다. <신과 함께>의 강림 같은 캐릭터가 오히려 연기하기 어렵다.”
그의 바람은 “관객과 함께 나이 먹는 친근한 느낌의 연기자로 기억되는 것”이다. 너무 강해서 부러지기보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나뭇가지처럼, 그의 꾸준한 힘은 ‘능청’에서 나오는 듯하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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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 비에이치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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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하고 아련한 이병헌의 ‘눈빛’ 때로 눈빛은 말보다 깊은 얘기를 한다. 이병헌의 눈빛도 그렇다. 28년간 여러 풍파에도 ‘배우’로서의 입지가 흔들리지 않은 데는 눈빛에서 비롯된 연기력 덕이 크다.
90년대 청춘스타 시절(<내일은 사랑>(1992) 등)을 거쳐 2000년대 연기파로의 성장기(<달콤한 인생>(2005) 등)도 잘 보낸 그는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배우가 됐다. <내부자들>(2015)의 정치깡패 ‘안상구’일 때도, <미스터 션샤인>(2016)의 달달한 ‘유진 초이’일 때도 마치 그 사람인 양 보는 이를 설득한다. 한 드라마 작가는 “이병헌은 눈빛에 캐릭터의 본심을 머금고 연기한다. 그가 극중 어떤 행동을 하든 관객은 설득당하며 몰입하고 그를 지지하고 만다”고 평했다. <백두산>에서도 그랬다. 초반 살벌했던 그는 아내를 만난 그 짧은 장면에서 리준평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리준평이 남한 대원들에게는 숨기지만 관객에게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들켜야 하는 순간이 있어요. 짧은 순간 관객이 그의 전사에 훅 빠지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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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 텐트폴 영화 <백두산>에 출연한 이병헌. 씨제이이엔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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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하면서도 아련함이 깔린 눈빛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오장육부에서 감정을 끄집어내려 노력한다. “최대한 내면을 그 감정상태와 가깝게 하려고 발버둥치다 보면 눈빛이든 표정이든 자연스레 딸려나오는 거죠. 껍데기를 먼저 만들고 내면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많은 배우가 그런 고민을 하지 않나. “음…. 전 캐릭터의 목적을 파악한 뒤 대본을 두세번 읽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요. 그 긴 시간이 도움이 됩니다.” 작품마다 원하는 것을 확실히 파악하고 그것에 충실한 영리함이 눈빛을 더 빛낸다.
작품 선택 기준이 “재미”라는 그는 <백두산>의 큰 스케일에 견줘 내용의 전형성이 아쉽다는 평가에 이렇게 답했다. “오락영화고 상업영화고 스케일을 강조하는 재난영화죠. ‘우리는 놀랄 만한 비주얼과 재미를 드리겠다.’ 그 두가지를 충족한다면 어느 정도의 전형성은 감수해야죠.” 긴 인터뷰의 마지막, 지쳐 보였지만 갈색 눈동자는 내내 빛났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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