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일 사할린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프리모르스키 블와르 ‘망향의 언덕’에서 ‘2005 국악축전’ 사할린 공연단이 60여년 전 일제에 끌려와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숨져간 러시아 한인 영령들을 위해 ‘망향제’를 벌이고 있다. 정상영 기자
|
광복 60돌 ‘국악축전’ 펼처져
러시아 연방 동쪽 끝에 있는 섬, 사할린. 인천국제공항에서 항공편으로 2시간반 남짓한 이곳에 1945년 해방 직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 탄광과 벌목, 도로공사, 운수공장 등에서 혹사당하다 해방 이후에도 추위와 배고픔, 고향의 그리움으로 60여년간을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온 우리 동포 4만여명이 살고 있다.이들은 1999년부터 사할린 동포 1세대가 한국에 영주 귀국하기 전까지 지난 50여년 동안 일본 정부의 외면과 우리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소수 민족으로 방치되면서 우리 말과 글을 거의 잊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5국악축전 조직위원회’가 광복 60주년을 맞이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원장 현기영) 주최와 국무총리복권위원회의 후원으로 지난 23일과 24일 사할린 현지에서 펼친 두차례 국악축전 사할린 공연 ‘하라쇼(좋구나)! 아리리요’는 지난 60여년 동안 그들의 핏속에 잠들어 있던 한민족의 신명과 정체성을 일깨웠다.
강제이주 아픔 서린 항구서 망향제 등
“젊은시절 생각나” 아리랑 부르며 눈시울
“살아 생전에 이런 공연을 볼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여러 선생님들께서 열성으로 하시니까 정말 재미있었어요.”
23일 밤 11시10분께 사할린주의 수도 유즈노 사할린스크시 체홉극장 앞. 공연이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는 정순이(68·유즈노 사할린스크시 소포즈나)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지난 1944년부터 61년째 사할린에 살고 있는 정 할머니는 공연이 끝나고도 손녀 배알리나(15·일호김나제 8년)와 함께 체홉극장 밖에서 이어진 뒷풀이 공연을 지켜보느라 극장을 떠나지 못했다.
이날 저녁 8시부터 유정아(전 한국방송 아나운서)씨의 사회로 진행된 체홉극장 공연에는 박해룡 사할린주 한인회장과 사할린 주정부 문화부장 등을 비롯해 550여석을 꽉 채운 사할린 한인 1~2세대들과 한국의 출연자들은 3시간10여분 동안 웃음과 눈물로 감동을 함께 나눴다.
|
23일 사할린 유즈노 사할린스크시 체홉극장에서 ‘2005국악축전’ 공연단이 공연 후 커튼콜에서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정상영 기자
|
특히 이날 공연 도중 1999년 한국 정부의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정책으로 인천에 영주귀국해 살던 정덕순(89) 할머니가 뜻밖에 등장해 소식이 끊겼던 딸 따냐와 손자를 극적으로 상봉하는 장면은 유정아 아나운서를 비롯한 출연진과 관객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이날 공연은 24일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2시간 동안 ‘사할린 텔레비전’로 방송된데 이어 25일에는 러시아중앙방송이 1차례 전국방영을 포함해 4차례 뉴스로 보도할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
이튿날 공연이 펼쳐진 코르사코프시는 1944년 무렵 한인들이 맨처음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도착했던 항구이자 해방 뒤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왔던 아픔이 서린 곳이다.
이날 공연은 낮 12시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프리모르스키 블와르 ‘망향의 언덕’에서 망향제로 풀어나갔다. 제주인 황준연 국악축전 집행위원장(서울대 교수)이 “못난 후손들이 오랫동안 찾아 뵙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자 모여선 한인들의 눈가에는 어느새 물기가 배여나왔다.
망향제에 이어 출연진은 사물놀이와 태평소를 앞세워 ‘아리랑’과 ‘농악’ ‘카츄샤’ 등 한국과 러시아의 가락을 연주하며 소비에트 스카야 거리로부터 시청까지 약 1km를 길놀이를 벌이기도 했다.
유정아 아나운서와 황철호 한인회장이 번갈아 가며 진행한 이날 공연은 코르사코프시 한인들에게는 축제이자 결속을 다지는 장으로 모자람이 없었다. 즈리브코 코르사코프 시장은 이날을 ‘한국의 날’로 지정했다.
1945년 23살 나이에 충남 논산에서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 60년간 코르사코프시에서 부인 박곱단(73)씨와 딸과 함께 살고있는 김창배(85)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참 ‘아리랑’ ‘도라지타령’을 많이 불렀다. 노래를 들으니까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고로드니코브 코르사코프 부시장은 “음악이 참 재미있고 건전하다. 한국 악기로 연주하는 러시아 민요가 흥미롭다”며 “오늘은 한국의 생일이다. 내년에 1돌을 맞을 때도 꼭 와야 한다”고 주문했다.
윤중강 예술감독은 “두차례 사할린 공연은 광복 60주년을 맞이해 아픈 역사를 살아온 사할린 한인들을 위로하려는 것 이외에도 사할린 한인과 러시아인들에게 우리 전통음악의 우수성과 매력을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며 “세계 곳곳에 우리 전통음악에 목말라 있는 동포들을 찾아가는 여정은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할린/글·사진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