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무대X파일 - 힌데미트 사건
역사상 이데올로기가 예술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강제력을 발휘한 때는 언제일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시기는 예술이 자유를 가장 크게 주창하였을 때와 일치하고 있다. 20세기 중반 예술을 정치적 사상의 선전도구로 이용했던 독일 나치즘과 연관된 몇 건의 사건들이 이를 증명한다. 나치에게 희생당한 예술가들의 면면을 들여다볼 때 그 안에 포함된 명단에는 유대인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상당수의 순수 아리안계 혈통들이 블랙 리스트에 올라있다. 힌데미트 사건, 일명 오페라 <화가 마티스> 사건은 이러한 부류 사건의 절정이었다. 독일 순수혈통인 힌데미트는 물론, 독일 고전음악의 대부였던 푸르트뱅글러까지 얽히면서 이 사건은 나치정부를 참으로 곤혹스럽게 만들었다.<화가 마티스>는 힌데미트가 직접 대본까지 쓴 오페라 작품이다. 주인공은 뷔르츠부르크 출생의 독일 종교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로,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는 궁정화가였지만 농민의 편에 서서 농민항쟁에 가담하다가 할레에서 사망했다. 힌데미트는 알자스 이젠하임 성당 제단에 그가 남긴 벽화의 제목을 세 악장의 표제로 각각 붙였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농민의 편에 선 마티아스의 행적을 찬양하고 당시 독일지역의 대주교가 자신에게 불리한 책들은 모두 태웠다는 장면을 묘사해 나치를 자극했다.
그렇지 않아도 힌데미트는 유대인 출신 음악가들과 실내악 운동을 벌이는 한편 1928년 베를린에서 초연한 <오늘의 뉴스>라는 오페라에 알몸으로 목욕탕에서 아리아를 부르는 장면을 포함시켜 검열 대상자로 올라 있던 터였다. 그러나 힌데미트는 검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심사가 끝나기도 전인 1933년 독단적으로 영국 비비시(BBC) 심포니와 함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는 교향곡 <마티스> 초연을 감행했다. 그 이듬해, 당시 나치 치하 제3제국 음악국 총감독으로 있었던 푸르트뱅글러가 그에게 동조하여 베를린 필을 데리고 독일 초연을 하였으니, 당시 나치 정부에 반대하던 대다수 독일 국민들은 콘서트홀에서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고, 결과적으로 엄청난 정치적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나치는 언론을 동원하여 힌데미트를 “유대화된 인물”이라 비난하고 정치적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푸르트뱅글러는 <화가 마티스>를 “순 게르만적인 걸작”이라 반박하고, “정치가 예술에 간섭하면 안된다”고 주창하며, “힌데미트를 잃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 맹렬하게 항변했다. 이렇게 항변한 당일날 저녁 푸르트뱅글러가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기 위해 베를린 슈타츠오퍼에 등장나자, 관객들은 그를 기립박수로 맞이했다고 한다.
결국 이 소문은 히틀러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힌데미트의 오페라는 상연금지처분되었다. 힌데미트 또한 베를린 음악원 교수직을 빼앗겼다. 이에 항의하고자 푸르트뱅글러는 베를린필 상임직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정치적, 예술적 공직에 사표를 던졌지만, 예상밖으로 이 사표는 수리될 뿐 아니라 심지어 출국금지처분까지 당했다. 그 이듬해 4월, 푸르트뱅글러가 결국 나치와 타협했다는 소식이 전 유럽에 퍼졌다. 그 다음 달에 그는 나치주의자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 속에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로 다시 복귀했다.
노승림 공연 칼럼니스트/성남문화재단 홍보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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