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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피터 추송웅’은 갔어도 광대들, 광기 불길 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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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 어제와 오늘
“나만 봐!~” 모노 드라마는 이 하나의 말로 정의된다. 배우에겐 더 없는 영광이자 부담이다. 3~4평 무대를 혼자서 채우며 수백 명의 관객과 조우하는 느낌을 손숙씨는 “관객을 독점하는 설렘과 그들을 책임진다는 두려움”으로 압축한다.
1960년대 연극 한 형태 시도
70년대 중후반 ‘전성시대’
90년대 스타성 검증 절차로도
2005년 추씨 작고 20돌
자녀들 추모행사
시간, 공간, 관객을 장악하고 싶은 욕심을 어느 배우라고 꿈꾸지 않겠는가. 그러나 꿈꿀 뿐이다. 손씨는 “모노는 관객의 힘으로 하는 것”이지만 “관객을 집중시키는 건 배우의 힘”이라고 말한다. 그 ‘배우’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모노극 무대에 오른 이는 한입으로 “기댈 사람이 없어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고 말한다. 쓸쓸함에 적응하면 체력의 한계가 온다. 손씨는 “너무 힘들어서 <위기의 여자> 이후 다신 모노극 무대에 안 설 줄 알았다.” <담배 피우는 여자> 때는 하루에 15개비 정도의 담배를 피며 서너 달 공연을 이어갔다. 무대 위에서만 빛이 사는 신비의 ‘파김치’다. 연극적 한계도 많다. 다역을 해내기도 어렵지만 하더라도 관객은 지루해 하기 십상. 5인의 배역과 1인의 5역은 엄연히 다르다. 무엇보다 생동감 있는 갈등을 드러내기 어렵다. 갈등이야말로 인간사를 비추는 연극의 생명인데, 배우 혼자 그 구멍을 메워야한다. “한국 모노극의 시점이라 봐도 무방할”(구히서 연극평론가) 1960년대부터 배우는 외로워했다.
그런 탓에 모노 드라마는 연극의 한 형태로서 시도될 뿐 딱히 그의 전성시대라는 게 있기 어렵다. 소나기처럼 왔다간 1970년대 중후반, 그 잠깐의 세월을 빼고는. 고 추송웅(1941~1985)의 덕분이다. 한국의 모노 드라마를 확실히 대중화시킨, 모노의 전성시대를 불러왔던 이다.
배우 박정자씨도 그때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제야 이 배우의 진가를 볼 수 있게 됐다’ 하면서도 그 순간 내 안에서는 질투심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그래, 나도 모노드라마 할 거야.”
올해로 영영 무대를 떠난 지 정확히 20돌이 된다. 모노 드라마 공연 1000회를 돌파한 그의 대표작은 당연히 <빨간 피터의 고백>(1977년)과 <우리들의 광대>(1978년·1인 6역)다. <…고백>은 공연 4개월만에 6만명, 1985년 작고할 때까지 482차례 공연해서 모두 15만2천여명의 관객을 불러 앉히며 미증유의 인기몰이를 했다. <우리들의 광대> 역시 24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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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부터 9일까지 열렸던 ‘세계야외공연축제 2005 경기’에서 고 추송웅씨의 <빨간 피터의 고백>을 배우 장두이씨가 새롭게 해석해 야외 무대에 올린 <춤추는 원숭이 빨간 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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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평론가 안치운씨는 추송웅을 두고 “연극이 처음으로 대중에 의해 소비되는 시대에 살면서 대중과의 만남에 가장 탁월했던 배우였으며,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한 도전의식과 반항의식의 표출인 배우의 광기를 온몸으로 발산하며 가장 극적인 삶을 살다간 우리 시대의 광대”로 평가한다. 그 광대의 손에 쥐어진 게 바로 모노극 대본이다.
그리고 1990년대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가장 극적으로 붐업을 일으켰던 때다. 이영미 한국예술연구소 책임연구원(한국예술종합학교 산하)은 “연극의 대중문화적 성격도 강해지면서, 대중의 시선을 모을 수 있는 독특한 모노 드라마의 기능이 중요해졌다”고 진단한다. 관객이 스타를 탐닉할 수 있다는 모노극의 본질 덕에 스타가 되기 위해, 또는 스타성을 검증하는 절차로서도 모노극은 다채롭게 활용됐던 것이다. 이는 동인제연극 양식이 막을 내리고 연극계에도 기획시스템이 유입된 90년대의 성격과도 맞물린다.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조차 박정자씨의 모노극 <그 여자 억척어멈>으로 신선하게 태어나며 인기를 끌던 때다.
한국 관객은 모노드라마를 좋아하는 편이다. 작품보다 스타 배우를 좋아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연구원은 “극보다 서사를 더 좋아하는 성향에 따른 것”이라고 평가한다. 즉, 일체의 해설 없이 갈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보다 이야기 전해 듣는 재미를 더 선호한다는 설명이다. <품바> <약장수> <너도 먹고 물러나라> 등 보조 배우를 끼고 하는 전통적 모노극이 적잖은 인기를 얻으며 이어져온 배경이다. <염쟁이 유씨>(유순종) <호랭이 이야기>(김헌근) 등의 2000년대 모노극이 배우의 명망에만 기대지 않은 채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게한 동력이기도 하다.
추송웅 작고 20돌을 추모하는 모노 페스티벌(02-325-5573)이 열릴 계획이다. 자녀인 극장 대표 추상욱, 뮤지컬 배우 추상록, 탤런트 추상미씨 3남매가 준비한다. 상록씨는 “아버지만큼 힘 있게 관객을 당기는 배우를 여태껏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페스티벌에서 다시 추송웅의 그림자를 만난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100미터 경주하듯…진짜 사투했어요
김성녀씨 ‘벽 속의 요정’ 만들어지기까지
공연 한달반 전 연출 시작
대사는 보름전부터 외웠는데
이틀 앞두고 새 노래까지
1인32역
막 오른게 신기했다
대본을 전체적으로 고친 것만도 너덧 차례. 그 사이 세목별로 다듬은 걸 따지자면 셀 수 없다. 모든 연극작품이 무대에 오르기 전 겪는 고행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작품, 좀 심하다. 객석 점유율이 대단하진 않았지만 오는 관객마다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배우’ 김성녀씨의 모노극 <벽 속의 요정>(6월10일~7월24일, 우림청담시어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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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미터 경주하듯…진짜 사투했어요-손진책, 김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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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후반 대목에 ‘결혼을 하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기로 했다’는 대사를 하는데 관객들이 막 웃어요. 전혀 예상을 못했던 대목이었거든요. 첫날 공연 때 너무 당황해서 그 다음 대사를 잊어버렸어요. 제 연기 인생이 30년인데 그런 일은 정말 처음이었어요.”
그럴 수밖에. 그의 30년 무대 인생에 모노극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사방에 기댈 이가 없다. “첫날 공연에 이렇게 비몽사몽했던 적이 없었거든요.” 자신을 훑는 관객들의 눈동자만 가득하다. “꼭 무인도에서 표류하는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꼭 인생을 닮았다고들 하는 걸까. 맞다면 김성녀씨는 올해 또 다른 삶 하나 질펀하게 산 셈이다. 그의 <벽 속의 요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고스란히 삶의 궤적이다.
또 다른 삶의 목표 : “마당놀이 배우로만 인식되는데 솔직히 좀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렇게 많은 작품을 했는데 김성녀의 ‘뭐’가 없는 거예요.” 결국 모노극이 통과 의례로 간주되는 스타 배우의 이야기로 가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그간 모노극, 대체로 지루했잖아요. 관객은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게 아닌, 배우로서의 참모습,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기량을 무대 위에서 내뿜겠다고 맘 먹어 왔어요.” 그리고 어린 순덕이부터 극중 인형극의 변사역까지 1인 32역을 해낸다. 대사가 1시간30분 분량이고 부른 노래는 12곡이다. 살랑살랑 춤도 춘다. “고귀하게 시 낭송하듯 모노극 하고 싶진 않았다”는 약속을 온몸으로 지켜낸다.
이것이 현실 : 모노극과 참 연이 닿지 않았다. <리퀘스트 콘서트> <여자의 역할> <점치는 여자>가 곡절이 생겨 번번이 물거품 됐다. <…요정>도 100m 경주하듯 준비했다. 사실 <…요정>은 일본의 후쿠타 요시유키의 명작이다. 후쿠타도, 극본을 맡은 배삼식씨도 원작대로 가자고 했다. 남편인 연출가 손진책씨는 반대했다. 번안, 각색만 거의 반년이 걸린 셈이다. 김씨도 여러 공연에 발목이 잡혀있었다. 결국 연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막 오르기 한달 반, 배우가 대사를 외기 시작한 건 보름 전이다. 하루 16시간 동안 연출가와 배우 등이 공연 무대에서 살다시피 했다. “대사를 외는데 바뀌기도 하고, 새로 노래가 나오면 그걸 외고…. 진짜 사투했어요.” 그래도 역부족, 공연은 결국 일주일이 늦춰졌다. 6월10일, 막이 오른 게 신기했다. 관객이 첫날부터 기립박수를 보낸 건 더 신기했다.
동반과 배반 : 김씨는 “우리 둘이니까 가능했다”고 말한다. ‘둘’은 부부다. 사실 하루 24시간을 호흡한 거나 다름없다. 손씨는 <…요정>을 두고 “아내에게 바치는 최초의 선물”이라 했다. 영국 연수 뒤 아내를 위해 <여자의 역할> 모노극 대본을 가져왔었지만 무대화하지 못했던 터다. “아내의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나이 들 수록 무대를 치장하는 게 싫다”는 손씨. 무대는 고스란히 아내의 것이다. 손씨는 “원래 내가 거미줄 조명”이라고 했지만 60개가 넘는 조명큐도, 간결한 무대 배경도 모두 아내에게 관객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삶의 공식에 따르면 동반이야말로 배반의 전제. “체력이 가장 걱정되긴 했는데 배우를 고려해서 이야기를 줄이고 싶진 않았어요.”(손) “이 사람 이렇다니까요. 아휴”(김) 손씨는 단호했다. “그건 배우가 승부해야할 문제”인 것이다. “대사가 이번처럼 안 외워진 작품이 없었거든요. 아, 내가 배우로 끝나나 보다, 망신당하겠다,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었어요. 외롭기까지 했죠.” 공연 이틀을 앞두고 ‘배반자’ 남편은 새 노래를 하나 더 주문한다.
삶은 나아가는 것 : 막은 오르기 마련이다. 배우는 내려올 수 없다. 대사를 잊어도 관객이 다 나가버려도. 2시간15분이 걸렸던 첫날 공연이 점차 2시간으로 줄었다. 고통도 익숙해진다. 여유가 생긴다. “과거 시제가 많아서 대사를 역으로 풀어야했죠. 손진책씨한테 따지기도 하고 화도 많이 냈는데 나중에 하다 보니까 이게 옳다 느꼈지요.”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야 했던 남편과 아내, 딸 순덕의 애잔한 사랑 이야기를 3~4번 본 관객이 속출했다. ‘야전 배우’ 김씨는 사실 체력보다 목을 더 많이 걱정했다. 32역의 목소리를 냄은 물론, 중년 남성, 소녀, 여린 중년부인의 노래까지 ‘변장’하듯 표정을 바꿔가며 불러야했기 때문이다.
“산삼, 산삼 진액 따위 듣지 보지 못한 건강식을 잔뜩 받았어요.” 웃는다. 이미 감동의 강장제를 한 사발 들이킨 관객들과 지인들로부터다.
“모노 드라마, 억지로 하는 게 많아요. 모노는 배우의 것이에요. 그런데 연기나 재주가 아니거든요. 인생을 보는 눈, 관객과 진솔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마음의 자세까지 자리잡은 이가 그야말로 발가벗고 무대에 서는 거예요.”(손진책)
김성녀의 <벽 속의 요정>은 다음달 현대백화점 지점 네 곳에서 특별 공연을 한다. 그리고 다음해 대학로, 예술의전당 등에서 연장 공연할 계획이다.
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사진 양예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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