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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블레드호수. 2017.10. 펜, 색연필.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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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박조건형의 일상 드로잉
⑩ 여행에서 배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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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블레드호수. 2017.10. 펜, 색연필.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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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져간 3~4인용 전기밥솥으로 밥을 해 먹은 건 여행 사흘째, 프랑스 랭스에서 짐을 풀고 나서였다. 전기밥솥에 밥을 안치고, 장조림(캔), 볶은 김치(캔), 깻잎(캔), 반찬 세개만 꺼내 놓고 먹었다. 그 세가지 반찬만으로 꾸린 조촐한 끼니가 참 맛있었다. 조금 양이 모자라는 것 같아서 전기밥솥에 물을 넣고 짜장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정말 꿀맛이었다. 비교적 저렴한 소고기도 사서 소금 참기름 장에 찍어 먹고, 김치찌개, 된장찌개, 돼지두루치기, 불고기 등등 열심히 해 먹었다. 흰 국물 라면이나 빨간 국물 라면을 끓여서 밥을 말아 먹거나, 포장으로 된 육개장이나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기도 했다. 한국 음식이 외국인들에겐 역한 냄새로 느껴질까봐, 주방이 숙소 안에 단독으로 있을 때만 다양하게 차려서 먹고, 그렇지 않을 때는 라면이나 국에 간단히 밥을 말아 먹었다. 비용절감 때문이긴 했지만 전체 일정 42일이 가까워질수록 나중엔 한국 음식마저도 조금씩 질리긴 했다.
여행이 ‘탈출’이라고 말하지만
거기서 배워오는 것은 역시
‘삶’이라는 여기 이곳의 일상인 것 같다
오랜 시간 떠나 있다 보면
여행은 여기 이곳과 많이 닮아 있고
여기 이곳도 여행과
많이 닮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프랑스 랭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프랑스에는 노트르담 성당이 몇 군데 있는데, 랭스에도 큰 성당이 있다. 공짜인 거 같아서 들어갔는데, 우리가 들어갔을 때 마침 합창단이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다. 성당이 아주 높은 지붕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합창 소리가 정말 웅장하게 들려왔다.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으며 높은 천장을 바라보니 정말 신이라도 마주하는 것 같은 어떤 경건한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전체 여행 일정에서 거의 초기 경험인데도, 지금까지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우연찮게도 비슷한 상황을 룩셈부르크 성당에서도 마주했다. 그곳에서도 성당에 들어갔는데, 노인들이 삥 둘러서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한 사람이 두 팔을 들어 올리자, 그 순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입을 맞추어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랭스 성당에서 들었던 아이들의 청아하고 맑은 음색이 아니라, 가녀리게 떨리며 온 힘을 다해 밀어 올리는 노랫소리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성당에 들어갈 때마다 서로 다른 노랫소리를 들으니, (종교는 없지만) 세례라도 받은 것처럼 온몸이 따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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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주유 중. 2017.9. 펜, 색연필. 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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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 화가. 2017.9. 펜.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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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애증의 도시(?)였던 프라하에서의 저녁노을도 정말 아름다웠다. 첫째 날 프라하 시내에 차를 몰고 갔다가 벌금을 물어서 첫인상이 정말 별로였는데, 그래서 우리는 다음날엔 대중교통편으로 프라하 근교를 돌아다녔다. 관광객들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비셰흐라드 고성은 사람들도 별로 많지 않았고, 산책하기에 정말 좋은 곳이었다. 고성의 사방으로 펼쳐진 경관도 프라하성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못지않았다. 저녁이 되어 카를교 쪽으로 걸어가는데, 해가 지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다리 중간에 기대서서 1시간 동안 한참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주황색에서 붉은색으로, 붉은색에서 다시 핏빛 어둠으로 이어지는 모습은 마치 프라하라는 아름다운 도시를 증명하듯 너무도 강렬했다. 어제는 최악의 프라하였는데, 그날은 다리 위의 그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감동적인 저녁이었다. 하루 사이에 똑같은 도시에 대한 인상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체코는 다시 가기 꺼려지는 나라들 중 하나로 기억되긴 한다. 그 노을이 너무나 아름답긴 했어도.
여행에서 숙소의 편안함은 꽤 중요하다. 네덜란드에서는 비용 때문에 캠핑장에서 4박을 했는데, 숲에 있는 큰 규모의 캠핑장이라서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고, 숙소도 단독으로 다른 집들과 떨어져 있는 구조라 맘 편히 요리해 먹고, 그림 작업도 하고, 쉬기도 했다. 4일 일정 중 하루는 돌아다니지 않고 캠핑장에서 쉬기도 했는데, 밀린 빨래도 하고, 우거진 숲속을 1시간30분 넘게 달리기도 하고, 짝지랑 산책도 하고 그렇게 평화롭게 쉬었다. 1시간 거리의 암스테르담까지 차를 몰고 가서 P+R 티켓을 구매해 전차를 타고 암스테르담을 돌아다니는 것도 재미있었다.(암스테르담은 주차비가 워낙 비싸서, P+R주차장을 이용하면 저렴한 가격으로 대중교통 티켓을 구매해 도시로 진입할 수 있었다.)
휴대전화 카메라 거치대를 챙겨 갔는데, 숙소에서 종종 휴대전화를 거치대에 설치해놓고서 우리가 밥 먹고 요리하고 차 한잔하고 대화하는 모습을 촬영하기도 했다. 그 영상을 다시 보면, 우리가 연극 속의 배우가 된 것 같기도 해서 배를 잡고 낄낄낄 웃기도 했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의외의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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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조각상. 2017.10. 펜, 마카.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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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장 놀이터. 2017.9. 펜, 붓펜, 젤리롤펜. 3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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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에어비앤비 숙소도 네곳을 잡았는데, 손님을 너무 배려해주는 호스트를 만나면 그들의 친절과 배려에 감동하게 된다. 대부분의 숙소에서 그들은 우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주고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우리 둘 다 새로운 사람과 쉽게 어울리고 함께 노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우리들만의 공간에서 쉴 수 있도록 챙겨주는 배려가 참 고마웠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그런 친절을 받으면 의사소통을 하진 못하지만 무언가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서 종이에 호스트들의 얼굴을 그려 선물로 전해주고 오기도 했다. 보잘것없지만 그런 거라도 전해주고 싶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도 배려였으니,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로 그에 대한 보답을 표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틀이나 사흘 혹은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의 여행과는 달리, 42일이나 되는 여행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힘든 기억들만큼 즐거웠던 순간들도 곳곳에서 우리를 반겨줬다. 힘들었던 때를 생각하면 다시 가기 싫고, 즐거웠던 때를 떠올리면 다시 가고 싶고. 여행이 ‘탈출’이라고 말하지만 거기서 배워 오는 것은 역시 ‘삶’이라는 여기 이곳의 일상인 것 같다. 오랜 시간 떠나 있다 보면 여행은 여기 이곳과 많이 닮아 있고, 여기 이곳도 여행과 많이 닮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다시 또 그렇게 긴 여행을 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요’.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한동안 나는 여기 내가 서 있는 곳을 여행하겠다. 언제나 그랬듯 느리고 서툰 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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