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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3.23 05:02 수정 : 2018.03.25 03:57

이성자 화백의 1962년작 <내가 아는 어머니>(부분·개인소장). 유년시절을 보낸 경남 창녕의 논밭 고랑에서 이미지의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의 60년대 대표작이다. 텁텁한 땅의 이미지를 올올이 천을 짜 직조한 듯한 느낌을 주는 화면은 유기적인 선들과 색채로 조밀하게 채워져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성자 작가 탄생 100돌 회고전
대지, 우주 등 국내 그린 화단 거장
51년 이혼 뒤 도불, 50여년간 대작 그려
50년대 초기 추상부터 1990~2000년대 우주시기 등
시기별 특징 따라 대표작 123점 선보여

이성자 화백의 1962년작 <내가 아는 어머니>(부분·개인소장). 유년시절을 보낸 경남 창녕의 논밭 고랑에서 이미지의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의 60년대 대표작이다. 텁텁한 땅의 이미지를 올올이 천을 짜 직조한 듯한 느낌을 주는 화면은 유기적인 선들과 색채로 조밀하게 채워져 있다.
이성자 작가의 81년작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7월 2, 81>(부분·개인소장)
그림은 그에게 삶을 발라 찍어낸 ‘좌표’였다.

땅에서 도시와 하늘로, 마침내 우주의 은하수와 별밭의 이미지들로 나아간 1만점 넘는 작품들은 증언한다. 이혼한 뒤 홀연히 이국으로 떠나 그 뒤 50여년을 붓질하고, 목판을 깎고, 도자를 빚으며 남긴 한 여성화가의 생애 굽이굽이를. 다채롭고 색면 위에서 리듬감 있게 율동하며 퍼져나가는 원과 반원, 세모 등의 추상적 기호들의 풍경은 장엄하며 황홀하다. 자신의 화업을 돌이켜보는 작가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리듯 눈앞으로 감겨 들어온다.

22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펼쳐진 여성거장 이성자(1918~2009) 화백의 탄생 100돌 회고전 ‘이성자: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은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작가가 추상그림을 그리며 쌓아올린 거대하고 다채로운 시공간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이 화백은 51년 남편의 외도로 결혼 12년 만에 가정과 세 아이를 포기한 채 프랑스로 떠난 뒤 혈혈단신 미술을 배우며 현지 화단에서 전시 등으로 인정받았다. 65년 열린 첫 국내 소개전 이후로는 고국과 프랑스를 오가면서 작업했고, 2009년 작고하기 전까지 1만4000여점의 작품을 남기며 파리 화단에서 가장 성공한 재불작가이자, 한국 추상회화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양 음양사상을 바탕으로 한국적 이미지들을 서양의 추상사조에 접목시켰다는 게 평단의 일반적 평가다. 전시장에는 회화와 판화, 목각 등 1950~2000년대의 시기별 주요 작품 123점과 아카이브 70여점이 나왔다. 출품작들을 50년대 ‘조형탐색기’와 60년대 ‘여성과 대지’, 1970년대 ‘음과 양’, 1980년대부터 작고 전까지인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등 네 주제로 나눠 배치했는데, 생전 전시 도록과 각종 포스터, 신문기사, 프랑스 시인 뷔토르와의 시화집 등의 아카이브 자료 공간들을 전시장 밖 공간에 대거 공개했다.

우선 눈여겨봐야 할 부분들로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는 ‘어머니와 대지’ 시기의 연작들을 꼽을 수 있다. <내가 아는 어머니> <감미로운 햇살> <밭고랑의 메아리> 같은 작품들은 마치 하늘에서 드넓은 농토를 내려다보는 듯한 구도에 빗금쳐진 선과 흙덩이처럼 자잘한 원 등이 등장해 이 땅 논밭의 고랑과도 닮은 이미지들이다. 농토를 갈며 가꾸는 것처럼 미세한 점과 선들을 숱하게 머금은 가운데 새순처럼 색채들이 피어 올라오는 이 연작들은 이성자 화풍의 근원적 모티브다. 가야인들이 제사 지냈던 경남 창녕 화왕산 기슭의 논밭을 뛰어놀았던 유년시절 기억과 어머니로서 이별한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 등이 작용해 화면에서 강렬한 회화적 긴장감을 끌어내면서 서구 추상과는 다른 따뜻한 정감을 빚어낸다.

다채롭고도 밀도감 높은 색감을 바탕으로 그의 말년 작품에서 더욱 확대되고 심화하는 동그라미, 세모, 반원 같은 음양과 생명의 기호들은 이 시기 화폭에서 처음 실체를 드러낸다. 누에가 고치를 치고 실을 잣듯이 한올한올 색조와 도상을 뽑아내는 치밀한 구성력이 돋보인다.

일제강점기 작가가 일본 도쿄의 짓센여대에 유학가서 의상을 전공하면서 패션 복식과 건축에 일찍부터 깊은 안목을 쌓았고, 이런 바탕을 깔고 50년대초 유학기 프랑스 추상사조의 영향을 적극 흡수한 끝에 ‘어머니와 대지’ 시기의 개성적 화풍을 잉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들머리 부분에 걸린 50년대 중반의 작업들이 그런 화풍 정립 과정을 증거하듯 보여준다. 1955~57년 사이 그린 인체 누드 정물화와 암스테르담 항구의 추상적 풍경, 파리 보지라르 거리의 반구상적 풍경은 회화적으로 이미 능숙한 수준에 오른 필력과 작가적 개성을 보여준다. 푸른빛, 보랏빛, 흰빛, 붉은빛 등의 강한 색조들을 소재의 윤곽 안팎에서 능숙하게 어울리도록 붓질하면서 극적 구도로 그림 속 정물이나 요소들을 배치하는 데서 작가의 뛰어난 재능과 화력을 엿볼 수 있다.

후반부의 말년 작업들은 감성, 구도가 크게 달라진다. 60년대 후반 뉴욕·브라질리아를 기행하면서 모더니즘 건축에 주목하게 된 작가는 율동하는 선과 원과 반원의 합일로 상징되는 ‘음양’ 작업을 그렸고, 이를 바탕으로 80년~2000년대 말년을 수놓는 <극지로 가는 길> <우주> 연작 등을 잇따라 내놓게 된다. 고국과 프랑스를 오가는 유목적 작가로서 ‘뉠 곳’의 정체성을 고뇌하다 극지의 허공, 밤하늘의 우주에서 합일의 가능성을 읽고 50년 화업의 마무리를 짓는 수순으로 요약할 수 있다. 비행기 차창 밖에서 본 알래스카의 극지 풍경에서 구상했다는 <극지로 가는 길> 연작들은 푸른빛 창공과 산맥, 그 사이를 맴도는 단청색 반원과 선, 점들의 환상적 도상들로 아롱져 있다.

전시장을 다 돌아보면, 대가의 눈길이 50여년의 작업기간 동안 땅에서 하늘과 우주로 서서히 옮겨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국의 산하 뿐 아니라 유럽과 미주를 돌며 누볐던 삶과 예술의 드넓은 공간들이 그림 속에 박혀있거나 다양한 추상적 요소로 변주되어 율동한다. 이땅 남녘의 텁텁한 밭이랑과 뉴욕의 마천루와 브라질리아의 계획도시, 비행기 창문으로 들어온 북극 극지의 산맥과 허공, 남프랑스 투레트의 언덕 작업실에서 바라본 밤하늘의 별밭들이 기하학적인 기호와 오방색 같은 원색의 촘촘한 어우러짐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970년, 1978년, 1988년 대규모 초대전을 이미 열었다. 작고 직전인 2008년에는 경남도립미술관에서 200점 넘는 대표작들로 역대 최대 개인전을 치르기도 했다. 이런 전례를 고려한다면, 이번 회고전은 사후 처음 열리는 대규모 기획전이라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 90년대 이래 국내 평단에 정립된 화풍의 시기별 경향을 재해석 없이 그대로 되풀이하는 안일한 얼개를 띤 탓이다. 이성자 화백은 프랑스 화단에서 50년 이상 활동했고, 현지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재불작가로 꼽힌다. 색채와 곡선의 율동을 강조한 오르피즘의 대가 소니아 들로네, 유기적 조각의 거장 장 아르프와 친교를 맺었고, 누보 로망의 거장 미셸 뷔토르와는 시화집을 잇따라 내며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현지 예술가들과의 오랜 교유가 갖는 의미라든지, 영향 관계나 요즘 문화계 관심사인 여성주의적 맥락의 접근 같은 새 관점의 전시를 기대할 만한 시점이지만, 이런 요소들은 이번 전시에 반영돼 있지 않다. 시기별 주요 작품들을 연대를 뒤집고 이리저리 뒤섞는 바람에 관람 동선이 끊기거나 엉키는 시선의 혼란도 눈에 콕 집힌다. 7월29일까지. (02)2188-6000.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90년작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1월 4, 90>(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소장). 80~90년대 한국, 프랑스를 오가는 비행기를 타면서 목격한 극지의 풍경을 모티브로 등장한 ‘극지 시리즈’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다.

2000년대 작업실에서 찍은 말년의 이성자 화백.

70년대 재불작가로 활약할 당시의 이성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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