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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02 05:01 수정 : 2018.04.02 08:15

[100℃] ‘막강 콘텐츠 파워’ 아트바젤 홍콩

게임은 이미 결판났다. 아시아 미술의 허브? 미술한류? 그런 목표를 추구할 선택지는 거의 사라졌다. 이젠 강자들이 정한 시장의 법칙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 29~31일 쇼핑·금융의 도시 홍콩에서 전례 없는 열기 속에 치러진 아시아 최대 규모의 국제미술품 장터(아트페어) ‘2018 아트바젤 홍콩’은 한국 미술판 사람들에게 냉엄한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2013년 창설된 이래 올해로 6회째인 아트바젤 홍콩은 막 신생 티를 벗은 행사인데도 한국 미술시장이 따라갈 수 없는 압도적인 물량과 막강한 콘텐츠 파워를 과시했다. 조직위원회가 엄선한 32개 나라 248개의 주요 화랑이 참여한 이번 페어는 작품 판매를 위해 흥정을 하는 통상의 판매전람회 성격을 벗어나 세계인을 끌어들이는 홍콩의 대표 문화브랜드로 자리를 굳혔다. 다른 말로, 중국의 거대한 경제력과 문화력에 빨려들어가는 세계 미술시장의 양상을 극명하게 표출했다고 보면 될 듯하다. 3일간 진행된 이 행사에는 관람객 약 8만명이 다녀갔다.

우리가 먹는 식기를 거대하게 확대한 중국 작가 저우위청의 설치 작품.

#32개국 248개 화랑 출품
미술장터 넘어 홍콩 문화브랜드로
스펙터클 현대미술 백화점처럼
시전공개마저 발 디딜 틈 없어
연간거래액 1조 ‘미술권력장’

#아트전용관 ‘에이치퀸스 빌딩’
아이웨이웨이 레고 자화상
요시토모 소녀상 조형물 등
대가 근작들 한자리서 보여주며
돈과 권력에 기댄 ‘덩치 미술’

컨벤션센터 1층과 3층에 각각 차려진 전시장은 ‘갤러리스’ 섹션으로 대표되는 근현대 미술사 명품들의 성찬이 차려진 간이 미술관과 젊은 작가들 위주의 ‘인사이트’, 전위적인 설치 작업 중심의 ‘인카운터스’, ‘필름’ 섹션으로 표상되는 실험적인 전시 공간, 대중을 위한 아트파크 체험장, 아카데믹한 미술, 사회 담론을 논하는 토크쇼, 미각, 패션 이벤트까지 시각문화와 관련된 온갖 즐길 거리 등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컨벤션센터 부근 도심에는 페이스, 하우저 & 워스, 화이트스톤 등 명문 화랑들이 입주한 에이치퀸스 빌딩 등의 전용관이 앞서 문을 열어 아이웨이웨이, 나라 요시토모, 마크 브래드퍼드 등 대가들의 근작들을 선보였다. 각종 미술관, 아트센터, 경매사들의 참신하고 덩치 큰 기획전들도 때맞춰 잇따라 개막했다. 해협을 끼고 주룽반도와 마주 보는 해변가에는 대형 천막을 친 군소 중견 화랑들의 위성 아트페어(아트센트럴)의 무대가 차려졌다. 이런 여러 미술전이 아트바젤을 중심으로 총체적으로 어울려 시너지를 내면서, 미술엑스포이자 고급스러운 아트 버라이어티쇼 같은 분위기를 낸 것이 행사 안팎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에이치퀸스 빌딩 안 탕 갤러리에 나온 중국의 세계적 거장 아이웨이웨이의 근작. 도자기를 떨어뜨리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을 레고블록으로 재현했다.
국제 아트페어는 당대 세계 유행을 좌우하는 유력 컬렉터들이나 작가군의 취향을 반영하는 장이다. 하지만 올해 아트바젤 홍콩은 딱 부러지게 뚜렷한 시대적 트렌드를 부각하기보다 아시아 미술의 특장을 중심으로, 스케일이 크고 스펙터클한 근현대 미술의 다채로운 양상을 백화점처럼 보여주는 얼개를 띠었다. 서구 쪽 화랑들에서는 키리코의 명징한 초현실회화와 모란디의 뭉근한 정물 그림을 보는 안복을 누릴 수 있었고, 피카소와 레제 같은 20세기 초 서구 거장들의 작품과 마주하는 것도 흔한 경험이었다. 미국과 영국 화랑들에서는 지난 20~30년간 세계 미술계를 진동시킨 거장들의 덩치 큰 명품들을 숱하게 볼 수 있었다. 명백히 국제 미술시장의 강자로 부상한 중국 부호들, 특히 1세대 부호들의 자식들인 2, 3세대 부호 소황제들의 미술 취향을 고려한 것으로 전시장과 관련 행사 곳곳에서 중국 컬렉터들에 대한 노골적인 구애가 눈에 띄었다. 키치미술의 대가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현역 작가 중 하나인 미국 아티스트 제프 쿤스가 지난 27일 낮 자기 작품을 낸 명문 화랑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 부스에 나타나 환호하는 관객과 악수를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은 것은 이를 반영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중국 본토나 대만에서 온 화랑들은 전통산수나 수묵화를 조형물로 만들거나 강렬한 붓터치를 이용해 현대 미술로 탈바꿈시킨 수작들도 내놓았다. 26일 개관한 에이치퀸스 빌딩에서는 아이웨이웨이의 레고블록 자화상과 난민 설치 작업, 나라 요시토모의 소녀상 조형물, 미국의 유망 작가 마크 브래드퍼드의 지도풍 구성회화들이 전시로 선보이며 아트바젤의 마중물 구실을 했다. 유행이나 트렌드보다 전시를 한 장소에서 집약해 보여주는 형식, 전시가 금력과 권력에 기댄 종합적인 문화브랜드로서 덩치를 키워가는 패턴에 집중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트바젤 쪽은 화랑들한테 현대미술 명품 위주의 기존 전시 구성을 벗어나 아시아적 특성 혹은 미술사적 맥락을 강조한 색다른 기획 방식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이치퀸스 빌딩 안 페이스 갤러리에서 선보이고 있는 나라 요시토모의 소녀상 조형물들.
# 중국 부호 위한 강자들의 잔치
컬렉터들, ‘소황제’ 취향 맞춰 구애
중국 산수 현대미술로 바꾼 수작도
미국 비싼 작가 제프 쿤스조차
부스 나타나 관객과 기념촬영

# ‘K-아트’ 존재감 키워갈 때
백남준·이우환 유명작가 외에도
신학철·강요배 리얼리즘 재조명
김환기 ‘푸른색 점화’ 96억 제시
“전력질주 중국 현대미술과 격차

현지 관객들은 전례 없는 입장 열기로 화답했다. 일반 공개 전인 27, 28일 브이아이피 고객들의 쾌적한 관람을 위해 먼저 열린 사전공개 행사(프라이빗 뷰)부터 인산인해였다. 넘쳐나는 인파들 때문에 집중하며 작품을 보기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수천평의 전시장 부스 구석구석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컬렉터들과 중국 부호들의 발걸음이 이어졌고, 한국 각지의 미술관, 비엔날레, 기획자, 유력 컬렉터들도 볼 수 있었다. 더 놀라운 풍경은 공식 개막일인 29일 일반 공개가 시작된 뒤 나타났다. 행사장 문을 열자 일반 관객들의 줄이 컨벤션센터를 여러 겹으로 싸고 돌면서 1㎞ 이상 장사진을 이루었다. 29일 입장권은 오전에 매진됐고, 관객들은 최소 1시간 이상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날 밤 9시까지 전시장이 개방됐는데, 저녁 시간 이후에도 북새통은 이어졌다. 홍콩에 소속 경매사 서울옥션 상설관을 최근에 차린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은 “수년간 아트바젤 홍콩 전시를 지켜봐왔지만, 관객들이 컨벤션센터 건물을 몇 겹으로 둘러가며 줄 서는 풍경은 처음 보았다. 대중들도 미술전람회 차원이 아니라 흥미롭고 총체적인 문화 이벤트로 보는 인식 변화가 일어난 것 같다”고 했다.

올해 아트바젤 홍콩 행사를 계기로 홍콩의 새로운 미술명소로 떠오른 도심 에이치퀸스 빌딩의 모습. 세계적 화랑들이 가득 입주한 아트 전용 빌딩이다.
이번 행사의 모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권위를 인정받는 미술장터인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다. 이 페어의 운영진이 일종의 브랜치(지점) 개념으로 2013년 홍콩 아트페어를 인수해 아트바젤 홍콩을 꾸린 이래로 불과 5년 만에 연간 거래액 1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한국 미술시장의 연간 규모는 4000억원) 미술권력장으로 우뚝 서리라고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유럽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술 매니지먼트와 비즈니스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력과 노하우를 갖고 있는 아트바젤 운영진의 역량과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중국 본토 및 화교자본의 금력, 권력이 그 배경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내년에 홍콩에 들어설 세계적 규모의 엠플러스(M+)미술관의 컬렉션을 둘러싸고 막대한 수요가 예상되는데다 무관세 지역으로 세계 어느 도시보다 유리한 유통 여건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 등도 작용해 일관된 중국 마케팅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고시언 갤러리가 출품한 백남준의 작품 <볼과 카메라>. 1974년부터 81년까지 볼 속에 카메라를 넣고 비디오아트 제작에 활용했던 작업 도구였다가, 볼이 터지자 아예 카메라와 붙여서 별도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한국 미술품들도 이번 페어에서 나름의 연륜과 경쟁력을 보여주었다. 백남준, 이우환, 서도호, 양혜규 등 유명 작가들의 신구 작품들은 국제갤러리와 학고재 등 11개 업체가 참여한 국내 화랑 부스 외에도 서구 부스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가고시언 갤러리 부스에서 에드워드 루셰이의 회화와 나란히 걸린 백남준의 <볼과 카메라>, 리먼 머핀 부스에 나온 서도호 작가의 천으로 만든 변기는 기발한 착상과 배치가 인상적이었다. 국내 화랑 부스는 지난해까지 인기 상품인 단색조회화 중심이었으나 올해는 신학철, 손장섭, 강요배 등 리얼리즘 계통 작가들의 작품과 김구림, 김용익 등 과거 실험미술 계열 작가들을 재조명하는 작업들을 내놔 다변화한 양상을 드러냈다. 국내 시장의 절대강자인 김환기의 인기는 여전했다. 29일 서울옥션 현지 경매에서 그의 구상작품 <항아리와 시>가 약 40억원에 낙찰됐고, 국제갤러리는 부스 들머리에 걸린 김환기의 푸른색 점화 대작에 무려 96억원이라는 역대 거래가 중 최고액을 제시해 컬렉터들 사이에 화제를 낳았다.

리먼 머핀 갤러리 부스 구석에 나온 서도호 작가의 천으로 만든 변기 설치물.
국제갤러리 부스 들머리에 내걸린 김환기의 푸른빛 점화 대작. 화랑 쪽이 거래가로 90억원대를 매겨 컬렉터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광주비엔날레, 백남준아트센터, 수묵화비엔날레 등 국내 여러 미술행사 관계자들과 주요 미술관, 화랑협회 관계자들은 현장을 바쁘게 뛰어다니며 정보 탐색과 행사 홍보를 했다. 3천명 이상이 찾아들어 역대 가장 많은 한국인이 올 것이란 예상이 나왔다. 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권위와 지명도 면에서도 압도적인 위상을 아트바젤 홍콩이 굳힌 만큼, 이젠 한국 미술이 동아시아 미술판에서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 긴요하다고 현장의 국내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아트바젤 이사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한 송보영 국제갤러리 이사는 “이번 아트페어는 중국이 21세기 현대미술에서 저 멀리 앞서가는 발걸음을 본격적으로 가시화하는 계기로 비치고 있다”며 “이 중요한 시기 우리 미술계가 얼마나 파이를 차지할 수 있을지 걱정과 부담이 생긴다”고 털어놨다.

홍콩/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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