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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07 19:17 수정 : 2018.10.07 19:37

[짬] 광주시립교향악단 김홍재 상임지휘자

광주시립관현악단 김홍재 상임 지휘자가 지난 5일 광주문예회관 연습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윤이상 선생님의 곡 가운데 제가 처음 연주를 지휘했던 곡이 바로 ‘광주여 영원히’였어요.”

지난 5일 만난 광주시립교향악단의 김홍재(64) 상임지휘자는 “이것도 인연”이라고 얘기를 시작했다. 그는 1989년 지휘자 데뷔 10주년 기념 특집을 겸한 ‘제1회 한겨레음악회’에서 ‘광주여 영원히’를 연주했다. 이 곡은 윤이상(1917~95) 선생이 1981년 예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5·18민중항쟁 때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김 지휘자는 오는 8일 저녁 7시30분 광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광주시립교향악단과 ‘민주’(民主)를 들려준다. 이 곡은 ‘오월 광주’를 너머 한국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김종률 작곡)을 모티브로 김대성 작곡가가 만든 교향시다. 광주시와 광주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이번 공연은 10일엔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12일엔 일본 도쿄 하르테논 타마홀에서 이어진다. 피아니스트 콘도 요시히로가 협연한다.

무국적 ‘조선인’으로 오자와 세이지 사사
1978년 대학생때 ‘도쿄필’ 지휘자 발탁
데뷔 10돌때 ‘윤이상 광주여 영원히’

‘임을 위한 행진곡’ 담은 교향시 ‘민주’
오늘 광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
10일 서울 예술의전당·12일 도쿄에서

‘윤이상의 제자’인 김홍재 상임지휘자는 남북한 교향악단을 두루 지휘해 본 유일한 한국 음악인이다. 광주시향 제공
김홍재 지휘자는 특별한 이력의 음악가다. 1998년 일본에서 ‘와타나베 아키오상’을 받았다. “정확한 지휘법에 기반한 그의 음악 표현은 현대음악의 대가 윤이상으로부터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후 활동이 크게 기대되고 있다”는 것이 그에게 상을 준 이유였다. 와타나베 아키오는 일본 필하모니 교향악단의 창립자로서, 일본 클래식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그를 추모하는 음악상을 받은 이에게는 일본 최고의 지휘자라는 명예가 따른다. 그런데 이 상의 네번째 수상자인 그는 ‘조선인’이었다. 일본 클래식계에서 일대 사건이었다.

사실 그는 국적이 없었다. 남북 모두를 조국으로 삼았던 부모의 생각 때문이었다. 해방 이후 일본에 살던 조선인들은 외국인 등록증의 국적란에 ‘조선’이라고 썼다. 재일동포 사회에 한국적이 생긴 것은 65년 한일협정 이후다. 그때 국적을 선택하지 않았던 ‘조선적’은 늘 북한 국적자로 오해받았다. 그는 무국적자여서 국제 콩쿠르에 나갈 수가 없었고, 비자를 받지 못해 외국 유학도 갈 수 없었다.

고베에서 태어난 그가 피아노를 만난 것은 다섯살 때였다. 외가엔 동네에서 유일하게 피아노가 있었다. 일본에 유학 온 인텔리였던 그의 아버지는 민족학교 교사였다. 어머니도 함께 교원으로 근무했다. 당연히 그도 민족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중학과정 시절 특별활동 시간에 클라리넷을 배우며 흥미를 느꼈지만, 음악 전공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고교과정 때 도쿄에서 열리는 민족악기 강습회에 다녀온 그는 처음으로 “관현악단을 지휘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하지만 정식학교로 인정받지 못한 민족학교 졸업생은 일본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외삼촌이 그를 받아줄 음대를 수소문했다. 도호대 음대에서 원서를 받아주겠다는 답변을 듣고, 입학시험 한달 전에 처음으로 악기점에서 클라리넷을 사서 레슨을 받았다. 그리고 ‘운명처럼’ 대학에 합격했다. 대학 시절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대학 연습실에서 살다시피하며 연주와 악보에 빠져 살았다. 그러면서도 틈틈히 아르바이트로 레슨을 하고 무대 공연장을 설치하고 막노동도 했다.

대학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를 사사했던 그는 78년 24살 때 대학생으로서 도쿄시티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발탁됐다. 세계적 권위의 ‘제14회 도쿄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로 입상했고, ‘사이토 히데오’ 특별상도 받았다. 사이토 히데오는 도호대 음대를 창설하고 최고의 사립음대로 키워 낸 인물이다. 일본에 귀화도 하지 않은 무국적 조선적이 일본에서 지휘자가 받을 수 있는 가장 권위있는 2개의 상을 받은 셈이다. 이후 나고야 필하모니, 교토필하모닉과 도쿄시티필하모닉 등에서 전임 지휘자를 두루 지냈다.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그에겐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다. 1986년 도쿄 산토리홀 개관기념 음악회에서 윤이상의 ‘교향곡 4번-암흑 속에서 노래하다’를 듣고 충격을 받아, “그 무언가”를 찾게 됐다. 연주회가 끝나고 윤이상에게 “선생님에게 배우고 싶다”는 편지를 썼다. 1989년 교토시티필에 사표를 내고 독일로 가려고 했지만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포기하고 고향인 고베로 갔던 그는 그 곳에서 만난 독일 영사관 직원의 도움으로 비자를 받아 그 해 10월 베를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윤이상 선생님은 저에게 지휘자로서의 철학과 사상을 깊이 심어준 스승입니다. 앞으로 윤이상 선생님 곡을 연주하는 것을 나의 인생의 큰 줄기로 삼을 겁니다.”(<김홍재, 나는 운명을 지휘한다>·김영사)

김 지휘자는 2년동안 윤이상 선생한테 배웠다. 베를린에서 유학하던 199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 통일음악회에서 김 지휘자는 윤이상의 곡 <서주와 추상>을 평양 국립교향악단과 초연했다. 일본으로 돌아와 92년 신일본 필 연주로 윤이상의 교향곡 3번 등 두 곡을 지휘했다. 그 때 윤이상 선생은 “아주 대담한 동시에 섬세하고 곡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스스로의 정서 세계까지 끌어 올렸으며, 동양적인 신비성과 유동성을 잘 발휘했다. 나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고 제자를 칭찬했다.

한국에 처음 온 것은 2000년이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한 아셈(ASEM)개최 축하공연 ‘한국을 빛낸 해외동포 연주가 시리즈’의 개막공연에 한국방송 교향악단의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2005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김 지휘자는 “아이들이 여권이 없어 수학여행에도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웠다”고 했다. 2007년 울산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겸 지휘자로 영입돼 10년동안 울산시향을 이끌면서 수준 높은 연주력을 선보였던 그는 2016년 11월 광주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취임했다. 김 지휘자는 남북한 교향악단을 두루 지휘한 경력이 있는 유일한 지휘자다. 그는 “광주의 음악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광주시와 광주문화재단은 올해 국내·외의 저명한 작곡가 4명을 위촉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다양한 형태의 관현악곡 작품으로 재탄생시키고 있다. 지난 5월 5·18기념음악회에서는 작곡가 황호준의 ‘님을 위한 서곡’과 김대성의 ‘민주’가 초연됐고, 7월에는 체코 프라하 리히텐슈타인궁전 안 마르티누홀에서 체코국립교향악단의 연주로 특별음악회도 열렸다. (062)670-7470, 7463.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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