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22 03:00
수정 : 2019.03.26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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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아 작가의 2016년작 <아무말 하지 않아서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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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립미술관 현대작가 조명전 첫 주인공
다채로운 색감과 소재의 작품 100여점
곁눈질하는 북한 여성·원전의 공포
한반도 상황까지 은유·풍자로 풀어
방 작가 “우리 현실 속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꿈과 희망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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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아 작가의 2016년작 <아무말 하지 않아서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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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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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장면들을 화폭에 올려놓고 주무를 수 있을까. 한복 입은 북한 여성이 기묘한 느낌으로 보내는 곁눈질이며, 방파제에 앉아 하이힐 신은 다리를 늘어뜨린 중년여성들의 한순간을.
리얼리즘 회화를 그려온 방정아(51) 작가의 전시장에 들어서면 관객들은 밝은 채색으로 번들거리는 색면 위에서 감각적인 여성과 자연, 생태 풍경을 만나게 된다. 숱한 잔선으로 미묘한 감정을 실은 한반도 여성들의 삶, 이들이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한국현대미술작가 조명전의 첫 순서로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지난 14일 개막한 방 작가의 회고전 ‘믿을 수 없이 무겁고 엄청나게 미세한’은 전시 제목의 느낌 자체로 보고 떠올릴 수 있는 전시다. 1990년대부터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지역성, 여성성이 가미된 리얼리즘 회화를 그려온 방 작가의 신구작 100여점을 망라해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출품작 대부분은 보는 재미가 출중하다. 눈이 즐거운 감각적인 화면이 가득하다. 사실적인 정밀 묘사에만 머물지 않고, 색감과 화면, 선 등의 조형 요소들이 작품마다 결을 달리하면서 시대와 현실에 맞춰 순발력있게 변모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일상의 삶에서 느끼는 다기한 감정들이 여성문제와 원전, 환경, 이념대립 등 사회성 강한 소재와 버무려지면서 메시지 측면에서 읽어내고 짐작할 만한 서사적 맥락을 풍부하게 깔아놓은 것도 장점이다. 전시는 신구작들을 다섯 영역으로 구획지어 한국 리얼리즘 미술에서 뚜렷한 독자성을 확보한 작가의 특장점을 영역별로 색다르게 느껴볼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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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아 작가의 2012년작 <샴 쌍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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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작가는 한국 여성의 삶을 풍자와 은유로 풀어낸 여성주의 작가로 화단에 알려져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엔 점차 한국 현대사의 사건과 흐름으로 뻗어갔고, 최근엔 원전과 환경·생태 문제까지 관심사를 확장해왔다. 주제뿐 아니라 형식적 측면에서도 선과 색감의 감각적 표현을 부단히 연마하는 노력이 언제나 함께 따랐다. 30년 화단 활동의 중간결산이라 할 이번 전시는 ‘가볍고 경쾌한 선과 색의 감각과 무거운 메시지가 공존할 수 있다”는 작가의 인식 변화와 그에 따른 역량의 단련 과정을 시기별 주요 작품을 통해 결을 짚어가며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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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작 <종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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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영역인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벌어진 주요 사건·사고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모여 있다. 전쟁의 불안과 공포의 양상을 표현한 ‘폭격’(2018), 원전 문제에 대한 극한적 불안감을 화폭에 부린 ‘원전에 파묻혀 살고 있군요’(2017) 등이 나왔다. 직설적인 고발이나 비판이 아니라, 선묘와 색감을 강조한 은유적인 화면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치열하였다, 그리하였다’ 섹션은 1995년부터 최근까지 작가의 삶의 궤적을 그린 작품들을 담았다. ‘튼살’(2001), ‘춘래불사춘’(2002) 등 여성의 몸과 삶의 이야기를 담았다. 매 맞는 여성이 공중목욕탕 문을 닫기 전에 급하게 목욕한다는 상상을 소재로 한 ‘급한 목욕’(1994), ‘집 나온 여자’(1996) 등의 작품은 현실에 뿌리박은 작가의 여성적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초창기 대표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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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가로 7m짜리 대작 <그녀가 손을 드는 순간>(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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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새 없이 변주돼온 그의 상상력 실험은 `불편하게 다독이는’ 영역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예술가를 마녀의 느낌마저 감도는 현대적 관세음보살 형상으로 그리며 세상의 탁류를 진단하는 자태를 담은 기지 넘치는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특히 마지막 ‘확장된 세계’에서는 자연과 환경에 이른 작가의 시선 변화가 드러난다.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에 대한 비판과 물의 생명력, 자연의 회복성에 대한 믿음을 엿보게 하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전시를 위해 그린 가로 7m에 달하는 대작 그림 ‘그녀가 손을 든 순간’(2019)은 남북간 화해의 기운이 스며든 최근 정세를 염두에 두고 한반도 사회와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담아낸 야심작이다. 그림 속 소품인 분수대를 재현하는 등 전시장을 실제 그림 속 배경처럼 꾸려놓고 관객이 마치 화폭 속을 거니는 듯한 분위기도 만들어냈다.
방 작가는 “내게 가장 중요한 화두이자 관심은 “‘바로 지금, 여기의 삶’”이라고 단언했다. “지금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상황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불안한 세상에서 꿈꾸는 희망 등을 그렸고, 앞으로도 그릴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그의 고백 섞인 다짐은 어언 30년 이상의 연륜을 쌓으며 창작된 ‘방정아표’ 리얼리즘이 묘사의 타성에 빠지지 않고, 여전히 신선한 감각과 해학을 발산하는 비결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6월9일까지 (051)744-2602. 부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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