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12 17:38
수정 : 2019.05.1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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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조선소 자리인 아르세날레 본전시관의 들머리에 내걸린 조지 콘도의 대작 <더블 엘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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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현장
120여년 역사 자랑하는 미술 축제
올해 주제 ‘흥미로운 시대에 살기를’
도발적 공격 메시지톤 낮추고
유연한 방식으로 소통·공감·호소
흑인·여성·소수자 주제 도드라져
본 전시 출품작가 79명으로 줄여
작가전시·기획 플랫폼 성격 강조
국가관 주무대 공원 본전시관 앞
인공안개로 혼돈스러운 현실 은유
한국관 전시 역대 최대 규모
작가 3명 ‘여성의 역사’ 성찰 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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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조선소 자리인 아르세날레 본전시관의 들머리에 내걸린 조지 콘도의 대작 <더블 엘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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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현대미술의 신전 앞에서 허연 안개가 일렁거리며 다가온다. 신전 위 지붕 아래 박공에 새겨진 `비엔날레‘란 알파벳 글자 주위를 유령처럼 덮어버리는 뿌연 물안개. 몸에 눅눅하게 감겨들거나 우울한 감성을 자극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피부에 촉촉하게 닿은 작은 물방울은 시원하고 상쾌했다. 관객들은 웃으며 안개 속으로 걸어가거나 주위를 뛰어다녔다.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최대의 격년제 미술제인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 58회 전시의 서막은 인공안개가 열었다. 전시의 주무대인 베네치아 시내 카스텔로 공원 안 본전시관 들머리를 장식한 인공안개는 라라 파바레토라는 작가가 물안개 뿜는 파이프를 건물 곳곳에 설치해 만들었다. 안개가 전시장 주위를 감싸는 상황이 오늘날 비엔날레와 현대미술이 직면한 혼돈적인 상황을 은유하는 듯하다. 시대감각의 안테나로서 예술가들이 직면한 현재 세계의 절망적 상황, 비엔날레의 정체성 혼란. 그럼에도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흥미로운 삶의 단면을 환기하는 예술의 기능이 존속된다는 것 등이 오버랩되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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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세계적인 대가인 히토 슈타이얼의 신작 <레오나르도의 잠수함>. 역동적인 영상 구성과 독특한 관람 구조로 인류가 직면한 생태환경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게 했다. 카스텔로 공원 본전시관의 대표작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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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헤이워드 갤러리 관장 랄프 루고프가 총감독이 되어 내놓은 올해 주제는 '흥미로운 시대에 살기를'. 주제인지 전시를 홍보하는 문구인지 모호하지만, 옛 조선소터인 아르세날레 본전시장과 카스텔로 공원 안의 본전시관, 국가관을 돌아보며 주제에 얽힌 의문은 다소 풀리는 느낌이다. 과거 으레 내놓았던, 문명 자본주의 비판의 전위적 도발적 메시지들을 소리높여 전시는 강변하지 않는다. 루고프는 100명을 훌쩍 넘었던 본전시 출품작가수를 79명으로 줄였다. 회화 사진 설치 등의 주요 장르외에 첨단 디지털 기법의 이미지 작업들과 극장식 볼거리들도 들여왔다. 90개국이 카스텔로 공원과 시내 곳곳에 차린 국가관들도 전시 기조는 비슷했다.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한 발언과 드러내기의 시선은 유효하지만, 메시지의 힘을 빼고 서로에게 우선 교감하며, 관객 자신의 영혼에 관심을 갖고 바라보려는 의도가 역력해 보인다. 사람들이 교감하고 예술적 언어를 교환하는 작가 전시, 기획 플랫폼의 성격이 강조된 셈이다.
아르세날레 본전시 들머리를 조지프 콘도의 대작 <더블 앨비스>가 장식한 것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술잔을 쥔 채 망가진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하며 건배하는 두 인물을 담은 이 작품은 글로벌 네트워크 시대에도 여전히 소통부재가 심각한 세계의 현실을 예민한 감성으로 표현했다. 예술적 소통의 상상력을 이야기하는 전시주제를 단적으로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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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뿌연 안개에 휩싸인 베네치아 카스텔로 공원 내 비엔날레 본전시관. 이탈리아 작가 라라 파바레토가 물안개를 뿜어내는 파이프를 건물 곳곳에 설치해 만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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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년 사이 세계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떠오른 히토슈타이얼은 광활한 전시공간과 영상스케일을 자랑하는 <이것이 미래다><레오나르도의 잠수함> 등으로 평단과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수십여평 공간 속에 철제파일에 달린 제각각의 스크린이 지구 곳곳의 여러 생태적 단면과 풍경을 비추면서 지구촌 환경 문제의 양상들을 관객들이 다채롭게 감지할 수 있는 구도로 만들었다. 실파 굽타의 100개의 시를 적은 쪽지와 100개의 마이크로 구성된 대규모 소리설치작품 ‘당신의 목소리에 맞출 수 없어요, 나는’을 선보이면서 메아리 같은 울림을 전시장에 채웠다. 검열에 대한 고발적 메시지와 미지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만남과 교감에 대한 갈망까지 함께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루고프가 본전시 마지막 부분에 유라시아 작가그룹이 만든 분수휴게실 공간을 설치한 것도 화제를 모았는데, 주제 강박적이며 관객 위에 군림해온 기존 비엔날레의 경직된 관행에 균열을 내겠다는 의도로 해석됐다.
올해 전시의 구성은 마냥 자본주의 체제 비판이나 정치권력에 대한 날선 풍자와 도발적 공격 등으로 메시지를 강퍅하게 풀어내는 기존 비엔날레의 전개방식과 달리 매우 유연한 것이 특징이다. 전반적으로 흑인과 여성. 소수자 문제를 다룬 그림과 사진, 설치작업들이 본전시, 국가관마다 도드라지게 등장한 가운데 메시지를 풀어내는 색다른 연출기법들이 눈에 띈다. 국가관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리투아니아관은 전시장 자체를 아예 퍼포먼스 배우 수십여명이 선탠을 하는 인공해변으로 만들어 기후변화 문제를 조망하는 파격적 얼개로 새로운 전시형식을 창출해냈다는 격찬을 받았다. 특별 언급상을 받은 벨기에관은 움직이는 자동인형들이 옛 마을사람들의 삶을 배우처럼 연출하는 극장이 됐고, 프랑스관은 오물들이 부유하는 심해 속처럼 전시관을 꾸며 연일 관람인파로 장사진을 이뤘다.
본전시도 개별 작가마다 충분한 전시공간을 배당해 밀도감을 높였고 타이의 영화감독 영상전문가 아피차퐁 위라세타쿨 등 잘 알려진 유명작가들도 대거 초대해 아트페어나 전시 박람회 같은 느낌도 주었다. 실제로 루고프는 9일 국립현대미술관이 아르세날레 부근에 차린 한국 작가 팝업전 전시장에 강연을 위해 왔다가 기자들과 만나 메시지 아닌 플랫폼 중심의 스타일을 강조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엄청난 플랫폼이다. 하나하나 기관들이 모여 베네치아비엔날레라는 강력한 예술세계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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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의 영화감독이자 영상작가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내놓은 설치영상. 사람의 꿈과 의식 속에 작동하는 여러 이미지를 재기 넘치는 구도로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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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계의 경우 95년 한국관이 개설된 이래 역대 가장 큰 규모로 참가했다. 김현진 기획자가 꾸린 한국관은 출품작가가 모두 미디어아트 작가란 점에서 주목도를 높이기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충실한 콘텐츠와 형식을 선보였다는 평이다. 묻혀진 한국 여성의 역사를 소재로 감각적이고 다채로운 형식의 미디어아트를 내놓은 정은영, 남화연, 제인진 카이젠 세 작가들은 각기 독특한 문제 상황에 부닥쳤던 역사 속 여성들, 그리고 현재 여러 성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색다른 각도로 끄집어내어 호평을 이끌어냈다. 좁고 한정적인 한국관 공간 구조 속에서 세 작가의 이야기가 하나로 집약되었더라면 국가관 수상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란 의견(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도 나왔다.
수상을 기대했던 스타작가 이불씨는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초소 잔해를 뜯어와 만든 <오바드 V>를 선보였으나 의미나 조형적 측면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각인시키지 못했다. 반면, 그의 작품 옆에 자리한 중국 작가 듀오의 움직이는 설치작업은 권좌 위에서 호스가 채찍처럼 난무하는 역동적인 이미지로 선보여 시선을 죄다 빨아들였다. 거칠고 역동적인 아르세날레 전시장에서 다분히 이념과 시대의 종언을 정적인 구조물로 이야기하는 이불 작가의 시도는 주목을 받지 못한 셈이다. 카스텔로 공원의 본전시관에 나온 `혓바닥‘이란 이름의 또다른 옷누더기 덩어리 설치작품이 훨씬 강렬해 차라리 이 작품이 아르세날레에 갔어야 했다는 촌평도 나왔다. 한국계 작가로 본전시에 출품한 아니카 이는 아르세날레와 카스텔로 본전시관에 곤충들이 사는 벌집 같은 서식 공간, 여성 몸에서 나온 박테리아를 배양한 설치물 등을 선보여 유기적 상상력의 새로운 도약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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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텔로 공원 본전시관에 내걸린 헨리 테일러의 흑인 초상. 이번 비엔날레는 여성과 흑인 등 소수자에 대한 조명이 도드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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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날레에 때맞춰 시내서 열린 거장 기획전들은 특별한 감상거리로 자리잡았다. 특히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시작한 독일 신표현주의 거장 게오르그 바젤리츠(81)의 회고 전은 압권으로 꼽혔다. 70년대 이후 작업해온 거꾸로 매달린 인물 군상 회화들이 초창기부터 최근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회색조의 유령풍의 인물 대작에 이르기까지 망라됐고, 크고 작은 목조각 신구작들도 출품돼 바젤리츠를 이해할 수 있는 전범 같은 전시가 됐다. 설치미술 거장으로, 60~70년데 아르테포베라(가난한 미술) 운동 주역이던 야니스 쿠넬리스의 프라다재단미술관 회고전, 팔라초 그라시에서 열린 루크 투이만 전, 팔라초 프란체티에서 열린 프랑스 거장 장 뒤뷔페 전 등도 또 다른 진미로 입에 오르내렸다.
베네치아/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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