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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15 21:18 수정 : 2019.10.15 21:22

[짬] 목원대 민족자주문화예술운동연합

대전 목원대 민족자주문화예술운동연합(목민문연) 창립 40돌 기념식이 열린 지난 12일 선·후배들이 모교 체육관의 걸개그림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송인걸 기자
지난 12일 대전 목원대의 체육관 안에 대형 걸개그림이 걸렸다. 푸르른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태극문양 북을 치는 이들과 천지 위에 뜬 상서로 구름 위로 한복 차림의 민중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북의 울림이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진다. 충청지역 대학민주화운동의 뿌리인 목원대 민족자주문화예술운동연합(목민문연)의 40돌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애초 지난해 40돌을 맞아 1년간 준비한 자리다

이날 ‘보고 싶다 친구여-응답하라 해방목원’ 행사에는 목민문연의 효시인 탈패 ‘쇠뚝이’를 창립한 이경남(신학 76학번) 목사·정진숙(미술교육 77학번) 교사·유영완(신학 78학번) 목사·걸개그림을 그린 탁영호(건축미술 80학번) 만화가를 비롯해 마지막 학번인 2007학번까지 80여명이 참여했다. 서슬 퍼런 유신독재에 함께 저항했던 이금희(청주교대)씨 등 다른 대학 문화패들도 찾아와 추억을 나눴다.

1978년 전통민중예술연 ‘쇠뚝이’ 효시
‘독재 타도, 양키 고 홈’ 대자보 ‘충격’
“유신정권 맞서 청년 저항정신 살려”
민요패·그림패·노래패·몸짓패…
충청권 대표 대학문화패로 자리매김

선후배 동문들 “응답하라 해방목원”

목원대 문화패인 목민문연 선·후배들이 12일 40돌 기념식에 앞서 길놀이를 하고 있다. 사진 송인걸 기자
사물을 앞세운 길놀이가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머리카락에 서리가 내린 전설의 선배부터 30~40대 후배까지 동문들이 사물을 치며 추는 몸짓은 세월이 무색할 만큼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민족 자존심과 민중의 끈질기고 진실한 삶을 배워 이 땅의 자주와 민주와 통일을 위해 한길에서 청춘을 불살랐던 문화예술 일꾼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예술을 사랑하면,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 우리라고 배웠습니다. 선배 열사들과 문화예술 선배들의 뜻을 기리고 더 큰 어울림의 해방된 목원인으로 살아가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홍성연(영어교육 83학번)씨가 축문을 올렸다.

목민문연은 1978년 전통민중예술연구회 이름으로 탈패 ‘쇠뚝이’를 꾸리고 창작극과 ‘봉산탈춤’을 공연하면서 충청권 대표 대학문화패로 자리매김했다. 탈패를 꾸린 것은 ‘유신헌법’을 통해 사실상 박정희 종신집권체제가 굳어지고, 산업화로 경제는 성장했지만 사회·문화적인 병리현상은 더욱 깊어지자 대학에서부터 전통 민중놀이에 담긴 해학성과 저항 정신을 청년문화로 되살려 내자는 취지였다.

초대 회장 이경남 목사는 “서울에선 70년대 초부터 이미 대학 문화패들 중심으로 문화운동과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반독재 투쟁을 했다. 이런 경향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데 힘입어 탈패를 창단했다”고 말했다. 그때 대전지역 4년제 대학은 충남대·숭전대(현재 한남대)·목원대뿐이었고 문화패는 숭전대에 유일하게 있었다. 이 목사는 “그때는 내가 충남대 놀이패에 가입하는 등 학교 경계를 넘어 어울렸다. 청주교대, 공주사대, 대전실업전문대, 고려대 조치원분교, 호서대 등 다른 대학의 문화패 창립도 도왔다. 우리가 공연하는 날은 곧 데모하는 날이었다”고 회고했다.

“탈패가 만들어져 활동한 지 얼마 안 돼 학교에 ‘독재 타도, 양키 고 홈’ 대자보가 붙었어요. 누가 붙였는지 뻔히 알죠. 나도 모르게 몸이 떨리더라고…, 숨어서 몰래 쓰던 ‘단어’가 세상에 나왔으니.” 정진숙씨의 걱정은 현실이 됐다. 회장 이 목사는 잡혀가 강제 징집당했다. 뒤를 이어 회장을 맡았던 유영완 목사, 고 김영범 목사와 많은 선·후배들도 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를 겪으면서 구속 등 고초를 겪었다. 84학번은 전원이 구속됐다. 이들은 대전권 대학생들이 꾸린 애국학생투쟁위원회(애학투)에서 활동하며 1987년 6월항쟁의 주력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목원대 민족자주문화예술운동연합 40돌 기념식 행사장에서 손때 묻은 옛 활동 자료들도 함께 전시됐다. 사진 송인걸 기자
목민문연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82년 민요패 ‘휘모리’, 87년 그림패 ‘그림얼’, 88년 노래패 ‘목마름’, 94년 몸짓패 ‘몸부림’을 꾸려 문화운동의 표현 양식을 다양화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활동 당시의 사진·가사집·선전물·행사 책자·국악기 등 목민문연 40년 역사도 함께 전시됐다. 등사해 만든 민요 가사집은 헤지고 손때가 묻었다. 선배가 후배에게, 후배가 그 후배에게 전한 흔적이다. 그림얼 동아리방을 지키던 나무 이름표, 깨진 꽹과리, 그 시절을 함께한 이름이 빼곡하게 적힌 장구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됐다. ‘민중문화의 불길로, 조국통일의 선봉으로’ 제목의 목대문화패 10주년 책자, ‘반미구국의 사자후-목원대 비대위’, ‘조국의 아들 민문연’ 등 자료, 필사본 운동권 서적도 추억이 됐다. 정인옥(국문 90학번)씨는 아이에게 “엄마는 탈패였다”고 자랑했다.

목민문연 출신 학생들은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탈춤을 가르치고, 목사로서 도시 빈민운동에 투신했다. 또 시민운동 활동가로 권력을 감시하고, 사업가로서 노사가 함께하는 직장을 만들며 학창시절 소망하던 소외 없는 사회를 위한 삶을 살고 있다.

이광진 목민문연 동문회장은 “목민문연은 선배의 희생과 동기의 현신, 후배의 노력으로 40년을 이어왔다. 우리가 추구한 자주, 민주, 통일 이념은 대통령직선제를 이뤘고, 노동문제를 공론화했으며, 광장 문화의 디딤돌이 됐다. 또 들불같은 시민의 촛불이 됐다”고 말했다.

송인걸 기자 sig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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