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07 18:25
수정 : 2019.11.08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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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와 대중음악을 접목한 음반 <지뢰: 땅의 소리>를 합작한 강권순(오른쪽)과 송홍섭. 음악역 1939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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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권순 명창·송홍섭 음악감독의 도전]
호흡 길고 박자 까다로운 정가
박자 분해·재조립해 악보 만들어
정갈하게 노래하다 로커처럼 분출
‘길군악’ 등 라이브 7곡 앨범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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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와 대중음악을 접목한 음반 <지뢰: 땅의 소리>를 합작한 강권순(오른쪽)과 송홍섭. 음악역 1939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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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는 국악 중에서도 유독 낯설다. 궁중과 사대문 안 양반들 사이에서 향유된 노래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익숙한 민요나 판소리를 대중음악과 섞는 시도는 많았지만, 호흡이 길고 박자가 까다로운 정가를 대중음악에 접목하는 시도는 좀처럼 없었다. 강권순 명창이 8일 발표한 음반 <지뢰: 땅의 소리>가 특별한 이유다.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여창가곡 이수자인 강권순이 대중음악에 흥미를 느낀 건 2015년 ‘광복 70년 기념 아리랑 대축제’에 참가하면서다. 사물놀이 대가 김덕수 명인이 이끄는 ‘아리랑 슈퍼밴드’에 가창자로 참여했는데, 밴드에는 송홍섭·정원영·한상원·한충완·이주한 등 대중음악·재즈 연주자들도 있었다.
“연주자들이 세세한 음표 없이 코드(화성)만 나온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게 신기했어요. 우리는 도제식으로 배워 악보의 쉼표 하나까지 다 지켜야 하는데, 대중음악은 코드로 만들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구나, 생각했죠. 그때부터 정가에 대중음악의 리듬과 반주를 접목하면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대중과 호흡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시작했어요.” 최근 서울 종로구의 자택에서 만난 강권순이 말했다.
2년 뒤인 2017년 강권순은 송홍섭에게 연락했다. 밴드 사랑과 평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등에서 활동한 베이시스트이자 음악감독인 송홍섭은 2015년 ‘아리랑’을 편곡해 악보를 만든 이였다. “멜로디를 받아 리듬과 화성을 만드는 게 제 일이거든요. 강 선생님 제안을 받고 정가에도 가락이 있으니 섬세하고 화려하고 복잡하긴 해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호기심도 강하거든요.” 송홍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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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와 대중음악을 접목한 음반 <지뢰: 땅의 소리>의 녹음 현장. 음악역 1939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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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명창 “끙끙대며 힘든 녹음했지만
전통·대중 어우르려는 고민의 결과”
송 감독 “우리 정가 악보화에 의의
2년 뒤엔 랩 넣어보는 거 어떨까요?”
편곡 작업에 들어간 송홍섭은 일부러 국악기 편성의 정가를 듣지 않았다. 선입견이 생길까봐서다. 노래만 놓고 백지에서부터 반주를 상상하며 만들어 나갔다. 먼저 노래의 박자를 모조리 분해한 뒤 재조립했다. 악보로 옮기고 보니 4분의 30박자, 8분의 48박자처럼 한 마디 안에 수십개의 박자가 들어갔다. 여기에다 화성을 붙여 악보를 완성했다. 이어 악보를 연주할 ‘송홍섭 앙상블’을 꾸렸다. 자신이 직접 베이스를 잡고, 남메아리와 박은선이 건반을, 서수진이 드럼을 맡았다. “제가 만든 틀 위에서 자유롭게 놀도록 하려고 즉흥연주에 능한 재즈 연주자를 모았죠.”
지난해 12월 송홍섭이 대표를 맡은 ‘가평 뮤직빌리지 음악역 1939’ 개장 축하공연에서 강권순과 송홍섭 앙상블은 처음 호흡을 맞춰 ‘길군악’을 선보였다.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나머지 곡들도 연습한 뒤 지난 7월23일 ‘음악역 1939’ 공연장에서 7곡을 라이브로 연주했다. 이를 녹음해 담은 것이 이번 앨범이다. 송홍섭은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그 순간의 연주자들 합이 고스란히 담겼다”고 설명했다.
“녹음을 앞두고 너무 두려워 잠도 안 왔어요. 이게 실패하면 지금껏 제가 쌓아온 것에도 악영향을 줄 게 뻔했으니까요. 하지만 송 선생님은 늘 ‘걱정 마세요. 잘될 거예요’라며 안심시켰어요. 그 덕에 결국 해냈네요.” 강권순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야 편하게 말하지만, 녹음할 땐 미치는 줄 알았어요. 국악은 서양음악과 음정이 미세하게 달라요. 귀로는 서양음악 반주를 들으며 입으로는 다르게 노래해야 하니 어찌나 힘들던지요. 정가에서는 숨 쉬고 싶으면 노래를 멈추면 돼요. 그러면 시계 자체가 멈춰요. 그런데 여기선 박자가 계속 가니 숨 쉴 틈도 없는 거예요. 난 숨도 못 쉬는 건가, 혼자 끙끙대며 몸부림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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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와 대중음악을 접목한 음반 <지뢰: 땅의 소리> 표지. 음악역 1939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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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든 결과물에는 전통과 새로움이 공존한다. 강권순은 단아하게 노래하다 갑자기 로커처럼 폭발하기도 한다. ‘길군악’이 그렇다. “우리는 무대에서 고개는커녕 눈동자도 돌리면 안 돼요. 희로애락을 속으로 삭이면서 정제된 소리를 뽑아내야 하죠. 그러다 보니 정반대로 화산처럼 폭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래서 해봤어요.” ‘우조 이수대엽’에선 후반부 내레이션에 구구단을 외우는 대목을 넣었다. “떠나간 님을 한없이 기다리는 여인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노래인데, 요즘 같으면 화를 낼 상황이다. 그래서 초딩처럼 욕설과 비슷한 발음의 구구단을 읊어봤다”고 강권순은 말했다.
“저도 50대의 중견이 되다 보니 변화보다는 전통을 지키는 쪽으로 기울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그럴수록 새로운 시도를 해야 후학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국악도 조금씩 발전한다고 믿어요. 남들이 뭐라든 내 위치에서 할 일을 하자는 생각에서 용기를 냈어요.”(강권순)
“정가를 악보화해 전세계 누구라도 우리 정악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는 데 의의가 있어요. 연주자들이 라이브를 많이 해서 계속 업그레이드해야 해요. 2년 뒤 이 곡들을 다시 녹음한다면 확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땐 랩도 넣고 헤비메탈도 해보면 어떨까요?”(송홍섭)
이들은 10일 오후 4시 옛 서울역 자리의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리는 서울레코드페어 쇼케이스에서 라이브 공연을 선보인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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