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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28 07:43 수정 : 2019.11.28 08:42

김정헌 작가. 자신이 1994년 그린 대작 <말목장터 감나무 아래 아직도 서 있는…> 앞에 섰다. 이 작품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첫 농민봉기가 일어난 정읍 말목장터의 감나무를 배경으로 괭이 들고 선 농민의 굳건한 자태를 그린, 작가의 대표작이다.

1980년대 ‘현발’ 동인 출신의 김정헌·노원희 작가
80~90년대 이후 구작과 신작들로 회고전 열어
일상과 역사를 성찰하며 길어올린 비판적 리얼리즘 그림들

김정헌 작가. 자신이 1994년 그린 대작 <말목장터 감나무 아래 아직도 서 있는…> 앞에 섰다. 이 작품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첫 농민봉기가 일어난 정읍 말목장터의 감나무를 배경으로 괭이 들고 선 농민의 굳건한 자태를 그린, 작가의 대표작이다.

“그저 보이는 것으로만 풀려고 하면, 미술은 질 낮고 품격 없는 예술이 됩니다.”

국내 진보 미술판의 큰 어른인 김정헌(74) 작가가 지난 16일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의 초대전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이’(내년 1월5일까지) 전시장에서 힘주어 한 말이다.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전에 출품했던 대표작 <말목장터 감나무 아래 아직도 서 있는…> 앞이었다.

작가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숨은 자부심도 털어놓았다. “보여주는 것에 더해 이야기를 품을 수 있다는 게 미술의 큰 장점입니다. 문학은 절대로 미술을 끌어안지 못해요. 하지만 미술은 문학을 비롯한 모든 장르를 품어안을 수 있어요. 얼마든지 가능해요. 그런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죠. 난 미술가로서 그렇게 해온 긍지 비슷한 게 있어요. 여기 작품들도 그렇고.” 단순히 시각적으로만 끝나지 않는 미술, 이른바 ‘문사철’과 소통하는 미술, 성찰하고 생각하게 하는 미술을 하려고 애써온 실천이 지난 40년 그림 작업의 길이었다고 노작가는 떠올렸다.

지하 1~3층의 출품작들은 특유의 개념과 인상·감흥으로 그의 회고담을 증거한다. 백제의 산수문 벽돌 ‘산경문전’을 추상적 도상으로 풀어냈던 77년의 소품부터 광고 문구와 민중의 삶, 광주항쟁 같은 격변기의 풍경을 결합시켜 진중한 팝아트 느낌을 주는 80~90년대의 현실비판적 이미지들, 최근 그가 몰두한 폐공장 폐기물 등 버려진 풍경과 쪼그린 채 생각하는 사람들을 그린 연작 등 신작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품들은 몇가지 양식으로 재단되지 않는 특징을 지닌다. 80년대 이래로 일상과 현실의 웅숭깊은 관찰자로서, 2000년대 초반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세월호 참사의 후속과제 해결을 위한 4·16재단 이사장 등 문화행정·문화정치에 직접 뛰어든 당사자로서, 수많은 층위로 이뤄진 문화예술 경험의 산물을 작업으로 직조해왔다. 그래서 출품작들은 단순한 이미지나 시대를 명멸한 사조만으로 재단할 수 없고, 작가가 접하고 삭혀낸 시대상을 담은 필력의 깊이와 무게감을 느낄 수 있다. 녹슬고 버려진 기계들의 조합된 단면 아래로 18세기 화가 윤용의 풍속도 속 나물 캐는 여인을 베껴 등장시키거나 아련한 꽃과 풀의 이미지를 대비시킨 기발한 구성에서 환경 위기에 대한 작가의 걱정, 인간의 탐욕에 대한 비판의식을 읽게 된다.

노원희 작가. 뒤에 걸린 작품은 2017년작 <포럼>이다.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한 정치권 포럼 행사의 풍경을 모티브로 그렸다. 남성 중심 사회를 재생산하는 정치권 남성 권력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내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김정헌 작가와 비슷한 성향과 이력을 지닌 노원희(71) 작가의 회고전도 거의 같은 시기에 서울 소격동 학고재 본관·신관에서 열리고 있다. 1980년대 초 국내 최초의 현실비판적 리얼리즘 작가 동인인 ‘현실과 발언’의 구성원으로 함께 활동했으며 김 작가처럼 특정 사조를 의식하지 않고 경험하고 체감한 현실과 일상, 시대를 꾸준히 작품 속에 녹여내는 작업을 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대비해볼 수 있는 전시마당이다.

‘얇은 땅 위에’란 제목이 붙은 이번 전시 출품작 36점은 본관에 나온 최근 2~3년 사이의 근작과 신관에 나온 90년대·2000년대 초반의 구작들로 구분되는데, 언론과는 또다른 맥락에서 지나온 시대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정서·감성을 담아온 노 작가 특유의 기록주의가 작동한 작품들을 보여준다. 집회에 나선 한무리 노동자들이 거대한 벽에 큰절하듯 엎드려 있고 다른 편에는 양복 차림의 남자 이미지가 동상처럼 선 대표작 <얇은 땅 위에>(2019)는 건재한 자본권력과 노동자들이 대치하는 구도를 보여주는데 싱크홀 뚫린 땅의 모습이 보여주듯 여전히 불안한 서민·민중의 삶을 암시한다. 미술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미술이 넘쳐나는 시대에, 두 작가의 작품은 성찰하고 고민하는 깊은 미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학고재화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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