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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25 19:16 수정 : 2019.12.26 07:55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광장’ 3부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승백·김용훈 작가의 설치작품 <마음>. 자동으로 작동하는 인공지능(AI) 카메라가 포착한 관객의 얼굴 이미지 정보를 토대로 이들의 표정에 나타난 감정들을 쇠구슬들이 떼 지어 굴러가는 소리로 표현했다. 금속용기(드럼) 15개 안에서 쇠구슬들이 실제로 굴러가면서 빚어내는 음향은 파도 소리와 다를 바 없다.

역대 최초 3개관 통합기획으로
‘미술 100년사’ 다룬 방대한 전시

진열 난해하고 동선 곳곳에서 충돌
1~3부 두루 꿰는 연결고리도 부재
미술관 역량 수준 여실히 드러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광장’ 3부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승백·김용훈 작가의 설치작품 <마음>. 자동으로 작동하는 인공지능(AI) 카메라가 포착한 관객의 얼굴 이미지 정보를 토대로 이들의 표정에 나타난 감정들을 쇠구슬들이 떼 지어 굴러가는 소리로 표현했다. 금속용기(드럼) 15개 안에서 쇠구슬들이 실제로 굴러가면서 빚어내는 음향은 파도 소리와 다를 바 없다.
‘좌충우돌’ ‘헐레벌떡’이 기획진의 속내였을까. 혼란과 격동, 진실과 거짓의 공방이 되풀이된 한반도 근현대사를 역시 그렇게 혼란스러운 전시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을까.

국립현대미술관이 지난 9월부터 서울관을 시작으로 덕수궁관·과천관에서 선보이고 있는 개관 50주년 대형 기념전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를 보면 여러 의문들이 생겨난다. 미술관 설명 자료 등을 보면, 이 전시는 소장하거나 대여한 미술품으로 살펴본 한국의 20~21세기 100여년의 역사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전시실에 들어가면, 지난 100여년간 생성된 미술과 시각문화의 이미지들이 곳곳에서 충돌하거나 어그러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외관은 방대하다. 역대 최초 3개관 통합기획전으로, 국내외 작가 290여명의 작품 450여점을 모아 꾸린 초대형 전시다. 월드컵, 촛불집회 등으로 한국인에게 익숙한 광장이란 큰 화두를 전시에 끌어들였다. 양식과 사조를 따지는 미술사가 아니라 미술과 시각문화에 구현된 우리 근현대사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는 뜻이다. 덕수궁관의 1부는 1900~1950년대, 과천관의 2부는 1950~2019년대, 서울관의 3부는 2019년 지금을 다룬다. 최소한 사나흘은 봐야 하는 분량인데, 보고 나면 분명하게 짚이는 것들이 있다. 수천여 종에 이르는 지난 100년간의 다기한 시각문화 이미지들을 단지 몇개의 코드로 단기간에 꿰는 것은 사실상 무망한 시도라는 점과 거대한 3관 통합기획을 사실상 1년도 안 되는 단기간에 펼쳐냈다는 사실과 전시의 내용 자체가 현재 미술관 역량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이다.

‘광장’ 2부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중앙홀. 안쪽에 87년 항쟁 당시 쓰였던 최병수 작가의 대형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가 내걸렸고, 걸개그림이 올려다보이는 홀 바닥에 이 열사의 운동화를 담은 진열장이 제단처럼 배치됐다. 옆벽엔 박생광 작가의 1985년작 <전봉준>이 보인다.
‘광장’전은 미술을 통해 한국 근현대기의 총체적 역사를 시각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미술관은 앞서 1997~2003년에 `근대를 보는 눈‘ 전을 필두로 한 9개의 전시를 진행하며 작가 782명의 출품작 1천700여점을 선보인 `한국 근현대 미술사 시리즈'를 완결했었다. 기시감이 큰 만큼, 작품들의 시대적 배경과 사회사·생활사 등에 걸친 오랜 연구 작업이 이번 전시에서는 필수적인 전제였다.

문제는 1~3부 전시에서 역사적 사료와 연계된 치밀한 사전 연구가 작품 배치와 연결된 맥락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2부 전시가 차려진 과천관 중앙홀에 나온, ‘광장’전의 대표 이미지 중 하나인 87년 항쟁의 걸개그림인 최병수 작가의 <한열이를 살려내라>의 주변 풍경이 단적으로 이런 맹점을 보여준다. 이 기념비적 대작은 가장 안쪽 유리창 난간에서 이 열사의 생전 운동화가 들어간 진열장과 당시 택시로 쓰였던 브리사 자동차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그 옆벽에는 박생광 작가의 역사화 <전봉준>이 붙어 있다. 생활사 박물관인지, 미술사 전시인지 분간이 안 되는 모호하고 이질적인 풍경이다. <한열이를 살려내라>의 2층 앞쪽 난간에는 비슷한 시기 개막한 한국 비디오아트 회고전의 패널들이 줄줄이 붙어 있다. 상세한 설명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동선이 충돌하는 탓에 전시장을 둘러보는 관객들은 관람의 초점을 잡기가 쉽지 않다. 2부 중간 부분에서, 60~70년대 우표와 가전제품 광고 등 시각이미지 변천상을 보여주는 높은 단과 주위 공간도 난해하기 그지 없다. 광고 사진이 붙은 단 바로 옆에 김환기와 장욱진의 50년대 차분한 구작들이 장독대, 백자와 함께 진열돼 있는데, 그 아래 공간에는 건축가 김수근의 60년대 여의도 개발안과 지금 여의도 모습을 다층적 설치작품으로 만든 최춘웅 건축가의 <부검한 미래>라는 건축 모형 조형물이 놓여 있다. 관점과 전시 맥락에 대해 기획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진다. 1, 2 전시실에서 연대기 순으로 진행되던 전시가 원형전시실에서 세월호 사건과 북한을 다룬 일부 작가들의 테마전 식으로 돌변하는 것도 보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광장’ 1부에 출품된 만해 한용운의 회갑연 시(1939) 복제본. 기획진이 애초 진본으로 알고 전시했다가 일부 컬렉터의 지적으로 뒤늦게 복제된 인쇄본으로 판명돼 복제본임을 전시 설명에 다시 밝히는 곡절을 치렀다.
첫 시작이라 할 덕수궁관의 1부도 입도마에 올랐다. 일제강점기 의로운 뜻을 편 항일지사들의 작품을 소개한다는 차별점을 내세웠지만, 일부 컬렉터가 제기한 진·위작 복제본 시비가 불거지면서 공신력에 큰 상처를 입었다. 고려대 박물관에서 빌려와 순국지사 민영환의 작으로 출품한 첫머리 대나무 그림과 독립운동가 신규식의 글씨가 가짜 작품 의혹이 커지자 전시중 교체됐고, 만해 한용운의 회갑 기념 시구와 당대의 감식안 오세창의 글씨는 뒤늦게 인쇄 복제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복제본 표기를 추가로 밝히는 곡절을 겪었다. 그 여파로 전시 종합도록과는 별개로 위작시비에 오른 작품들을 배제하고 1부 출품작들을 재정리한 정본 자료집을 따로 내는 상황까지 벌어졌다.국립미술관으로서는 전례 없는 치욕이다. 미술관 쪽은 정식 사과문을 내어 공지하지 않고 슬그머니 문제 작품을 내리거나 복제품 표기를 작품 제목 옆에 추가하는 미봉책을 써서 다시 입길에 올랐다.

현재 한국 미술판의 청년 소장 작가들이 일부 외국 작가들과 함께 참여한 서울관 3부는 21세기 디지털 시대 변화한 광장의 의미를 묻는 매체 영상 작품들을 주로 전시했다. 인공지능(AI) 카메라가 포착한 관객의 얼굴 이미지 정보를 토대로 이들의 표정에 나타난 감정들을 쇠구슬들이 떼지어 굴러가는 소리로 표현한 신승백· 김용훈 작가의 설치작품 <마음>이나 디지털 게임의 풍경 속에서 시대와 세상을 생각하는 요즘 청년세대들의 의식 지형을 보여준 김희천 작가의 <썰매> 같은 일부 신선한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전시는 전반적으로 1~3부를 두루 꿰는 화두인 광장의 의미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명쾌한 해석의 고리를 제시하는데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들이다.

혹평과 논란에 가려진 감이 있지만, 모더니즘 일색의 작품으로만 메워지던 국가박물관에 한국 미술사의 소외 지대를 과감히 부각시킨 것은 돋보이는 대목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북명 소설 <질소비료공장>의 노동자 삽화를 그린 이상춘 등의 프롤레타리아 미술 작품, 최재덕 등 월북 작가의 수작들, 지방 화단의 숨은 실력자였던 송태회, 박기정의 서화, 과천관에 나온 오윤, 최병수 작가의 걸개그림 등에서 보이듯 `광장‘ 전을 통해 제도권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역사 현장의 작품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성과로 꼽을 만하다.

이런 노력에도, 전체 전시는 내부 직원들 사이에서 나온 `임기응변’이란 촌평에 더 어울린다. 초점과 문제의식을 명확히 내세우지 못하고, 시대별로 명품과 대표작을 백화점 식으로 추린 관료주의적 타성이 도드라졌다. 복제품과 진품을 구별 못해 진위 시비를 촉발하는 등 기획 역량의 근본적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예술행정에 정통한 문체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신랄한 의견을 내놓았다. “개관 50주년이란 중요한 기점에서 마련한 역대 최대규모의 전시가 국제적인 주목은 물론 국내 미술계 관심을 모으는데도 미흡했다는 평가가 부처 안에서 나온다. 21세기 글로벌 미술관에 요구되는 브랜드 차별화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는게 문제다.”

미술계 한켠에서는 전시를 만든 주축인 정규직 학예연구관들의 안일하고 고답적인 기획전 운영 관행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는 `물갈이론‘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윤범모 관장은 국내 1세대 큐레이터 출신이다. 이번 전시를 둘러싼 논란을 미술관의 내부 개혁을 이끌어낼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미술계 안팎의 목소리를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주목된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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