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6.08 18:28
수정 : 2017.06.08 21:22
|
1987년 6월9일 반독재 민주화 시위를 하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씨의 장례식 노제가 그해 7월9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사진은 연세대에서 출발한 운구 행렬을 시민들이 맞이하는 모습. 연합뉴스
|
6.10항쟁 30돌│ 87년 체제 넘어 2017년 체제로
1987년 사회변화 목소리 컸지만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며
시민사회 아닌 야당이 주도권 잡아
정치세력 타협 탓 근본적 변혁 좌절
‘독재-민주’ 구도 → ‘보수-진보’로 왜곡
이명박근혜 정권서 독재유산 부활
2017년 ‘촛불’ 현재진행형의 혁명
시민이 요구한 개혁으로 완성해야
|
1987년 6월9일 반독재 민주화 시위를 하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씨의 장례식 노제가 그해 7월9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사진은 연세대에서 출발한 운구 행렬을 시민들이 맞이하는 모습. 연합뉴스
|
“야권 정치세력은 권력과의 타협적인 방식에 의한 정권획득 내지 권력배분에 집착하기 때문에 민주화의 철저한 실현, 민중적 요구의 수렴에는 소홀할 가능성이 크다.”
32년 전인 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였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초대 의장 김근태)은 소식지 <민주화의 길> 11호(11월5일)에서 이렇게 썼다. 민청련은 ‘민주제 개헌’ 투쟁을 천명하며 “완전한 민주주의의 보장, 민중적 경제질서의 수립, 민족통일의 의지 관철” 등 세 가지 목표를 내세웠다. ‘대통령 직선제’가 ‘민주화’의 전부로 호도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이에 맞서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요구한 것이다.
2년 뒤인 1987년 6월10일, 광장에 울린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해 냈다. 넥타이 부대가 거리로 흘러나왔고 빌딩에선 최루탄 연기 속으로 두루마리 휴지들이 떨어져 내렸다. 전국 각지에서, 정확히 집계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국민이 거리로 나왔던 그때. 민주화운동의 밑바닥에 흘렀던, 우리 사회를 근본적인 수준으로 바꿔내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는 한국 사회 최초의 ‘시민사회’를 탄생시켰다. 87년 전후 민주언론 운동, 노동자 운동, 여성운동 같은 시민사회운동이 기치를 올렸고 지금까지 사회 변혁을 위한 씨앗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당시 사회경제적 조건을 바꾸자는 아래로부터의 다양한 목소리가 ‘직선제 개헌’이라는 과제 때문에 뒤로 밀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대체로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화 세력 사이의 ‘타협’으로 이뤄진 ‘87년체제’의 한계를 그 이유로 지적해왔다. ‘6월항쟁’이 “직선제 개헌이라는 최소강령적 요구만을 실천한 정치협약”(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으로 서둘러 마무리됐다는 것이다.
6월항쟁 30돌을 맞은 최근 학계에서는 87년의 성과는 그대로 인정하되, 그때 타올랐던 변혁의 불씨를 이어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광장의 ‘촛불’이 대통령을 퇴진시키고 정권 교체를 이뤄낸 오늘, 다시금 찾아온 변혁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것이다. 지난 7일 열린 ‘6월항쟁 3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에서 정일준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87년 6·29 민주화 대타협은 정권과 반대세력 사이의 ‘파멸적 균형의 결과’였다”고 밝혔다. 권위주의 정권과 민주화 세력 어느 쪽도 상대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점하지 못한 가운데 ‘대타협’이 이뤄졌고, ‘항쟁’이 사회를 뿌리부터 바꿔 내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는 것이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최근 계간 <역사비평> 119호에서 6월항쟁 이후 개헌 과정을 주도한 ‘8인 정치회담’이 각자의 이해에 따라 ‘직선제’라는 제한적인 목표를 추구했다고 분석했다. 반면 “87년 체제가 공정한 경쟁, 절차적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당시의 정치적 목표를 상당한 정도로 실현”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에 견줘 박태균 서울대 교수(한국현대사)는 제도정치권의 ‘타협’보다 사회운동세력 스스로 가진 한계가 크다고 비판했다. <역사비평> 119호에 실은 논문에서 그는 <민주화의 길>을 분석해 80년대 사회운동세력이 꿈꾸었던 사회개혁의 높은 이상과 좌절을 짚었다. 민청련은 당시 공개적으로 사회운동을 벌인 유일한 단체로, 1984년 3월 창간한 소식지 <민주화의 길>은 민중운동의 전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특히 세계정세와 국내정세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정세동향’은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높은 수준의 현실 인식을 보여줬다고 한다. 예컨대 창간호 ‘정세동향’을 보면, 당시 세계 체제가 미국과 소련의 양극화 체제에서 ‘신냉전 체제’로 변화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그 아래에서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을 해온 한국 경제의 대외종속성과 경제적 불균형 등 내부의 파행성이 심화되고 있다고 풀이한다. 박 교수는 “통일 문제와 ‘독점 재벌 해체’로 압축되는 사회경제적 모순 해결이 당시 가장 두드러진 두 가지 경향성”이라고 짚었다. 당시 서서히 형성되던 시민사회계는 신자유주의 물결의 단초를 발견하고 있었으며 ‘수저계급론’ ‘경제민주화’ 등의 담론으로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 또한 이미 수면 아래 들끓고 있었던 셈이다.
|
1985년 11월 사회운동단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발간했던 소식지 11호. 당시 정치권의 개헌 논의에 대해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요구하며 ‘민주제 개헌’을 주장하는 내용이 실렸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당시 사회운동세력은 나름 정확한 현실 인식에 뿌리를 내리고 뚜렷한 개혁 방향을 제시했다. <민주화의 길>이 제안한 ‘민주제 개헌’ 내용을 보면, 단순한 ‘대통령 직선제’를 넘어 “비대해진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의 기능을 활성화한다”, “국민저항권을 신설하고 참여민주주의를 보장한다” 등의 제안도 등장한다. ‘민중적 경제질서의 수립’ 같은 요구는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급진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최저임금제 실시”, “일할 권리의 실제적 보장”, “(제헌헌법에 담겼던) ‘이익균점권’의 부활”, “노동자의 경영참가권 보장”, “납세부담의 평등 실현” 등 세부항목들도 마찬가지. 분단체제의 극복이 사회 변혁의 필수적 과제라는 인식 또한 담겼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차대한 요구들은 어디로 갔을까? 박 교수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간 사회운동세력 스스로의 책임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당시 사회운동세력은 87년 개헌 과정에서 제도권 야당에 주로 기대다가 배제됐다. 이후 정권에서는 정치 공간에 진출하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요구들을 현실화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런 와중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위한 공간 자체도 사라졌다. 박 교수는 “‘독재 대 민주’의 구도가 ‘보수 대 진보’의 구도로 왜곡되는 현상이 이때 일어났다”고 짚었다. ‘보수 대 진보’라는 프레임 아래에서 ‘독재 유산의 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힘을 잃었고, 그렇게 살아남아 쌓인 폐단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이르러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2016년 12월3일 저녁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당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제6차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촛불 파도타기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는 지난 3월 펴낸 책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서강대학교출판부)와 ‘6월항쟁 3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발표 등에서 “촛불에 참여한 많은 시민들이 바란 것은 단순한 박근혜의 물리적 퇴진을 넘어서 보다 근본적인 우리 사회의 변화였다. 때문에 ‘항쟁’에 머문 6월항쟁과 달리 이번 촛불은 ‘촛불혁명’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혁명’”이라는 의미 부여다.
30년 전 6월항쟁은 ‘직선제 쟁취’라는 1차적 목표로만 대표될 수 없는, 거대한 사회 변화의 요구를 품고 있었다. 2016~17년 촛불 광장에 터져 나온 다양한 계층과 세대의 요구는 87년 6월항쟁이 낳은 시민사회계의 확장이자 당시 항쟁이 뿌린 씨앗의 발아라고 할 수 있다. 학계의 분석은 30년 전 시민사회가 낳은 광장 민주주의의 정신을 보듬어 안고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잊지 않아야 촛불 역시 비로소 ‘항쟁’이 아닌 ‘혁명’의 위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진단이기도 하다. 한 세대가 지났지만, 여전히 87년 6월항쟁이 끝나지 않은 이유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