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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25 20:44 수정 : 2018.10.25 21:41

[짬] 하와이대 명예교수 서대숙 박사

지난 10월23일 서울 광화문 서머셋팰리스에서 만난 서대숙 박사는 10년에 걸친 ‘연구 자료 기증’을 마무리하면서 학자적 소신과 통일의 희망을 얘기했다. 김경애 기자
“모든 학문이 그렇듯 시작은 호기심이었어요. 이승만 정권의 ‘김일성 가짜설’을 비롯해 ‘북한’이란 단어조차 금기가 되는 것을 보면서 객관적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가 컸어요. 학문의 목적은 진실 추구이고, 학자는 목을 내놓더라도 진실과 소신을 지켜야 합니다.”

‘한국 공산주의 연구가’, ‘김일성 박사’로 불리는 서대숙(87) 하와이대 명예교수가 이제는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잡은 ‘북한학’을 개척하게 된 이유는 이처럼 단순하면서 단호했다.

그는 1952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이래 60년 넘게 몰두해온 항일독립운동과 북한 관련 연구 자료 1만여점을 독립기념관과 한신대에 모두 기증한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했다. “내 방식을 따라서 연구하라는 뜻은 전혀 아니예요. 다만, 이 분야를 연구하는 후학들이 계속 더 나와서 통일의 그날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죠.”

24일 독립기념관 ‘서대숙문고’ 기증식에 이어 26일 한신대 ‘서대숙 통일역사문화자료실’ 현판식 참석을 위해 1년 만에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방한한 서 교수를 23일 만났다.

‘김일성 가짜설’ 호기심에서 시작
60여년 북한·공산주의운동 연구
1만여점 독립기념관·한신대 기증 완료
“북한에도 없는 희귀자료들 상당”

74년 첫 방북 이래 남북 모두 ‘주시’
방대한 사료 바탕 객관적 사실 추구
“학자라면 목을 내놓고 소신 지켜야”

10월 26일 개원하는 한신대 ‘서대숙 통일역사문화자료실’에서 열람할 수 있는 서대숙 박사의 북한 관련 자료 7천여점 중에는 지금은 북쪽에서도 찾기 힘든 1940~50년대 희귀 자료들이 적지 않다.
그는 1964년 미국 컬럼비아대 박사학위 논문을 정리한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67년 프린스턴대 출판부)와 또 다른 저서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70년 컬럼비아대 출판부)을 통해 일약 북한 연구 권위자로 국제 정치학계에 데뷔했다. 그는 특히 ‘김일성이 분명히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학술적으로 첫 논증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객관적 연구 물꼬를 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그는 오랜 세월 남·북 모두에서 ‘의혹’과 ‘감시’를 당해야 했다.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 단 한번도 북한과 비공식적으로 접촉한 적이 없어요. 하와이대 교수 부임 초기인 74년 처음 평양을 방문할 때도 주 정부를 통해 유엔대표부에 공식으로 북한 비자를 신청해 발급받아서 갔어요.”

그의 첫 방북은 남북한 사이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에서 서 교수의 발언인 것처럼 ‘가짜 인터뷰 뉴스’를 만들어 “북이 남침 준비에 광분하고 있다”(<한국일보>)는 엉뚱한 보도가 터져나왔고, 이에 북쪽에서도 그를 “자본주의의 개”라고 비난했다. 당사자인 그는 “새삼 객관적이고 냉정한 접근의 필요성을 절감한 경험”이라고 했다.

훗날 재방북했을 때 황장엽 당시 김일성대 교수가 개인적으로 사과를 하는 등 북한에서는 그를 ‘민족적 양심이 있는 학자’로 인정해 배척하지 않았다. 그는 황 교수와 97년 망명 직전 도쿄에 머물 때와 서울로 온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교유했다. 오히려 ‘북간도에서 독립운동한 목사(서창희)의 아들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검증을 받기까지 남쪽에서 더 오랜 세월이 걸렸단다. “박정희 대통령 때 비공개 초청을 받아 만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은 건 89년입니다. 그때 서울대에서 1년간 ‘북한개론’을 강의했지요.”

마지막 방북은 김정일 사망 직전인 2010년께였다. “하버드대 포럼에서 ‘북핵’ 관련 강연을 했는데 그 내용을 알고, 북에서 초청한 거였어요. 개인적으론 북한이 핵개발을 하는 건 싫지만, 미국이 핵실험을 시작하고 핵무기를 가장 먼저 사용했듯, 주권국가로서 북한에도 권리는 있다, 일방적으로 북핵만 비난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논지였지요. 물론 반론도 뜨거웠지만 내 소신을 굽히지는 않았어요.”

이처럼 그가 학문적 일관성과 소신을 지켜올 수 있었던 힘은 방대한 자료와 철저한 검증 덕분이다. 2009년부터 시작해 올해 마무리한 독립기념관 기증 자료는 항일독립운동 관련 3700여점으로, 영어·일어·중국어·러시아어 등 국내에서 구할 수 없었던 책과 문서들이 대부분이다. 한신대 기증본은 북한 관련 자료 7천여점으로, 그가 직접 작성한 연구 카드와 파일까지 망라했다. 그의 자료 목록에는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 과정과 권력세습, 주체사상 형성과정, 공산화 과정 등 최근까지의 북한 정치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한신대 자료실에는 서대숙 박사가 수십년 동안 직접 작성한 ‘연구 카드’도 고스란히 옮겨왔다.
“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 기록을 비롯해 55년 조선중앙통신사에서 펴낸 <해방후 10년 일지>, 57년 <평양지>(평양향토사편찬위원회)와 <평양의 어제와 오늘>(국립출판사), 68년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평양 인문과학사)처럼 이제는 북에서도 찾기 어려운 희귀 자료들이 적지 않아요. 통일이 되면 북쪽 학자들도 와서 공부할 수 있겠지요? 허허.”

자신의 서재를 그대로 옮겨왔다고 말할 정도로 모든 것을 내놓은 그가 여전히 남겨둔 ‘극비 자료’가 있다. 바로 ‘김일성 면담 기록’이다. “김일성 주석을 처음 만났을 때 비공개하기로 약속했으니 지키고 싶어요.” 이 자료들은 그의 사후 공개될 예정이다.

한신대는 26일 오후 3시부터 중앙도서관 4층 북카페에서 ‘서대숙 박사 기증 통일역사문화 관련 자료 기증식’과 함께 이들 자료의 가치와 활용방안에 대한 좌담회를 연다. 이어 이번 기증 자료의 가치와 의미, 향후 활용방안, 아카이브 구축 방안 등에 대한 간략한 발표도 진행될 예정이다.

연규홍 한신대 총장은 25일 “서 박사의 기증품 가운데 북한 사회의 변화, 북한의 생활사 연구에 유용한 자료들이 많아 통일 이후 역사·사회·문화 통합을 위한 정책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서 교수의 저작물 대부분이 영문이어서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을 서두르겠다”고 밝혔다.

김경애 기자, 김기성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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