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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05 18:10 수정 : 2019.12.10 15:27

한겨레말글연구소 ‘한·일 갈등과 언어 문제’ 연구발표회

한·일 갈등 국면서 “일본 정부, 세심하게 언어 관리”…한국 정부도 관리하지만 반영 잘 안 돼
보수 진영 언어에 일본 시각 반영 지적… “피해자와 약자의 언어, 한일 공통의 언어화가 숙제”

2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3층 청암홀에서 열린 한겨레말글연구소 제14차 연구발표회 ‘한·일 갈등과 언어 문제’에서 나익주(마이크 든 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이 발표를 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한국과 일본의 ‘언어 갈등’ 못지 않게 우리 내부의 언어 갈등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임경화 중앙대 접경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는 지난 2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3층 청암홀에서 ‘한·일 갈등과 언어 문제’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 행사에서 ‘한일 갈등에서 나타난 한국과 일본의 언어 사용 차이와 함의’라는 발표를 통해 “정부 차원에서 언어가 세심하게 관리되고 있다”며 일본 매체에서 ‘수출 규제’가 ‘수출 관리’로 바뀐 과정을 소개했다. 이 행사는 한겨레신문사 부설 한겨레말글연구소가 주최한 제14차 정례 연구발표회다.

임 교수는 “2019년 7월 일본 경제산업상이었던 세코 히로시게가 자신의 트위터에서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 <엔에이치케이>(NHK)가 ‘수출 규제’라고 표현한 반면, <요미우리신문>은 ‘수출 관리’, <산케이신문>은 ‘수출 엄격화’라고 표현했다. 엔에이치케이는 수출 규제라는 말을 쓰지 말고 이번 조처의 정확한 표현으로 전문가 세계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수출 관리’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며 “그 뒤 실제로 엔에이치케이는 ‘수출 관리’라는 말을 쓰게 된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로 언어를 관리하려 하지만 일본과 달리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8월22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연장하지 않기로 한 한국 정부 결정에 대해 한국 매체들은 지소미아 ‘파기’ 또는 ‘깼다’고 보도하는 쪽과 ‘종료’로 보도하는 쪽으로 갈렸다. 임 교수는 “청와대는 협정 종료 조항에 입각해 이뤄진 조처인 만큼 ‘파기’가 아닌 ‘종료’를 사용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초기 혼란 이후 현재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은 ‘파기’를, <한겨레> <경향신문> 등은 종료를 쓰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용어 선택의 차이는 각 언론사가 한일 갈등을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인 나익주 전남대 영미문화연구소 연구원은 ‘한일 갈등을 둘러싼 한국사회 언어 균열’이라는 발표를 통해 일본의 수출 제한 조처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 역량과 한일 갈등에 대한 대응책 평가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에 인식의 간극이 있었다고 말했다. 나 연구원은 “보수 성향의 신문 사설은 ‘무능’ 프레임에 근거해 현 정부를 ‘무능한 얼치기’로 묘사했다. 반면 진보 성향의 신문은 정반대로 ‘용기’ 프레임에 근거해 현 정부를 당당한 전략가로 묘사했다”며 “무엇이 바람직한 해결책인지를 두고서도 정치적 성향에 따라 상당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이는 2019년 7월1일부터 8월9일까지 <한겨레> <경향> <조선> <중앙> 등 언론사 4곳의 사설 115건을 분석한 결과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국어국문과 교수)도 우리 내부의 언어 갈등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김 위원은 이날 ‘민족, 국가 간 갈등에서 언어의 기능’이라는 발표에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등이 펴낸 <반일종족주의>는 식민지 시대의 ‘수탈’을 ‘수출’로 ‘강제징용’을 ‘관 알선’과 ‘자발적 선택’, 그리고 ‘로망’으로 묘사하고 있다. 수출은 당시의 쌀 반출을 ‘상품과 화폐의 교환 과정’으로만 볼 때는 아무런 하자가 없는 경제 활동에 대한 표현”이라며 “그러나 당시의 소작 제도, 과중한 소작료율, 쌀 반출로 말미암은 쌀값 인상, 그로 인한 빈민들의 굶주림 등 ‘구조적인 현상’으로 보게 되면 모호하던 수탈의 모습이 또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보면 당시 조선 상황 악화에 일본이라는 세력만이 아니라 조선인 지주 계급도 동조했다는 것이 분명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반일종족주의>가 일본의 시각이 반영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일본의 가해자 시각이 배어 있는 언어 사용 사례가 여럿 제시됐다. 일제 시대 때 일본으로 유출된 도서 1천여점을 한국으로 반환하는 과정에서 한자어 반환(返還) 대신 단순한 ‘건넴’이라는 뜻의 히키와타시(引(き)渡)를 쓰거나, 사죄(謝罪) 대신 ‘가볍게 미안하다’는 뜻부터 ‘깊이 사죄한다’는 뜻까지 폭넓게 쓰이는 오와비(おわび)라는 표현을 고집한 점 등이다.

김 위원은 “일본 정부와 지난번 한국 정부의 화해치유재단 졸속 설립은 결과적으로 화해와 치유가 아니라 혐오와 상처의 재단을 만든 셈”이라며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얽히고설킨 의미 갈등을 정리하려면 구조적 의미와 역사적 의미부터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쌀 반출이 수출인지 수탈인지, 조선인의 무력 저항이 독립운동인지 테러인지, 또 원폭 피해를 받은 조선인들은 그 피해를 누구에게 호소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제대로 의미 해석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피해자와 약자들의 목소리가 전개한 역사가 있다. 그 역사를 통해 탄생한 언어를 한일 공통의 언어로 얼마나 반영해가는지가 숙제”라고 말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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