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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08 18:32 수정 : 2006.06.09 15:00

해가 떨어진 직후 잠수교에서 바라본 강변북로. 군청색 하늘에 빛나는 나트륨 등이 유난히 따뜻한 느낌을 준다. 자세히 보면 재두루미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잠수교가 가라앉았을 때의 그 감동!
학창시절 비가 많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150원 같은 요금으로 휘휘 돌아가니까
자전거를 끌고 나오니 그때로 돌아간듯


홍은택의 서울 자전거여행 (2)

자전거 타기엔 서울이 내가 가본 미국의 어느 도시보다 나은 점이 있다. 가로등이 잘 발달해 있다. 안 보이는 라이더를 자처한 나로서는 자전거에 전등이 없지만 주행하는데 불편함이 없다. 한강 강변부지의 나트륨등이 앞길을 비춰준다. 가로등 불빛에 부서지는 어둠속을 달리면 정말 어디 멀리 가는 것 같다.

잠수교가 신나는 것은 마치 수면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눈높이에서 강을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강심에서 바람을 받으면 강 속으로 빨려들 것 같은 전율을 느낀다. 한강은 넓다. 워싱턴 DC의 포토맥강, 런던의 템즈강, 로마의 티베르강 등 세계를 경략하고 있거나 했던 제국 수도들의 강들은 한강에 비하면 한낱 하천에 불과하다.

한강은 수비형 강

그런데 강 주변을 보면 이쪽이 허전하다. 지금은 아파트촌들이 강을 두고 양립하고 있지만 오래 전에 개발된 흔적이 없다. 이것은 템즈강이나 티베르강의 양쪽에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즐비한 것과 대조적이다. 내 생각에는 공격형 강이 있고 수비형 강이 있는데 템즈나 티베르와 같은 제국의 강들은 군사적으로는 세계로 진격하는 공격루트의 시작이고 군사적 약탈의 결과로 얻은 세계의 문물을 가져오는 빨대였다. 진격하기 위해서는 강과 되도록 가까운 곳에 건물들을 지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반면 한강은 수비형 강이다. 외침을 수없이 당한 나라로서는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 강을 방어선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북쪽으로는 북한산의 산자락으로 방어벽을 쳤을 테고. 그러면서도 강과 산 사이에 넓은 터가 있으니 천혜의 입지조건이다. 나는 풍수지리를 모르지만 배산임수라는 것은 주로 수비만 하고 살아온 나라에서 발달한 지리개념이 아닐까 싶다. 한국전쟁 때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 것도 강이 방어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의 민족의 DNA에 새겨진, 본능과 같은, 그러나 잘못된 결정이었다.

그 인도교가 복구된 게 1958년이니까 한동안 한강에 다리 없이도 살았던 것 같다. 하긴 36년에 지어졌다가 미군이 폭파해 부서진 광진교가 52년에 복구되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 서울시민과는 관계없는 외곽의 다리였을 뿐이다.

서울은 무학대사를 들먹이지 않아도 그렇게 수비형 관점에서 세워졌기 때문에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뛰어난 자연과의 조화를 자랑한다. 특히 도심에서 가까운 곳에 북한산 도봉산 인왕산과 같이 인간친화적인 산들이 포진해 있는 수도는 드물다. 아예 산자락에 있는 잉카문명의 요람 페루의 마추픽추라면 모를까.

수비형 관점은 꽤 오래 유지됐던 것 같다. 한강에 다리를 놓을 때 최우선적 고려는 군사적 판단이었다. 그래서 한강을 놓기 시작한 순서를 지금 보면 조금 엉뚱하게 느껴진다. 인도교 복구 이후 가장 처음 놓은 다리는 제2 한강교로 불리던 양화대교였다. 65년에 지어졌는데 합정동과 당산동을 잇는 다리다. 서울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광진교와 함께 북한의 남침에 대비한 군사물자 수송이 주 목적이었던 것 같다.

한강에 다리 놓기 유행이 시작된 것은 <당신은 모르실 거야>의 혜은이가 모처럼 빠른 템포로 부른 <제 3한강교>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될 당시 서울로 진입하는 다리로 건설된 한남대교다. 69년의 일이고 그 뒤 오랜 역사적 침묵을 만회하려는 듯 다리가 미친 듯이 지어지기 시작하는데 70년 서울대교로 불리던 마포대교, 72년 잠실대교, 73년 영동대교 그리고 몇 년 뜸하다 드디어 내가 딛고 있는 잠수교가 76년에 지어진다.

그 뒤에도 많은 다리가 지어졌지만 잠수교만큼 흥분을 자아냈던 다리는 없었다. 비가 오면 물에 잠겼다가 물이 빠지면 다시 떠오르는 다리. 그래도 끄떡 없는 다리라는 서울시의 설명에 모두들, 특히 중학교 1학년생이던 나는 비가 오기를 기다렸다. 홍수가 와서 잠수교가 가라앉았을 때의 감동이란. TV에서는 잠수교가 감쪽같이 사라진 한강을 보여주며 물이 빠지면 다시 떠오를 것이라고 보도했다. 예상대로 물이 빠지자 다리는 그 위용을 드러냈고 나는 TV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도 그렇게 오랫동안 잠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중심서 떨어진 곳부터 다리 건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봄처럼 부지런해라’ 광화문 교보문고에 걸린 대형 글귀다.
더구나 배가 지나갈수 있도록 중간에 다리를 들어올릴 수 있는 승개 장치까지 있었으니 가히 인공지능 교량이다. 그 때는 월남(남베트남)이 패망한 지 얼마 안 되는 때였는데 다리가 낮은 포복을 하고 있기 때문에 폭격하기가 무지 힘들다거나 또는 폭격기가 뜨면 물 속으로 살짝 가라앉았다가 지나가면 다시 부상한다는 말조차 들렸다. 만약 잠수교가 갑자기 잠수함으로 변해 북한에 침투한다고 말해도 나는 믿을 준비가 돼 있었다. 한강다리들 중 795m로 가장 길이가 짧아 복구하기 쉽도록 만들어진 다리여서 군사적 목적으로 지어진 것은 맞긴 맞지만.

첨단 교량이라는 이미지에 오래지 않아 금이 갔다. 잠수교가 다시 물 밖으로 나오면 바로 차량 통행이 재개되지 않는다. 서울시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수많은 환경미화원들을 동원해 다리 위에 쌓인 쓰레기 더미를 치우는 것. 별별 쓰레기가 다 나온다고 한다. 잠수교 팬이었던 나는 서울시가 잠수교를 긴 뜰 채로 활용해 한강의 쓰레기를 건져낸다고 생각하자고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환경미화 기능까지 있으니 얼마나 첨단인가.

“비가 많이 오면 못 다닐 다리를 왜 만들었지?”라고 주위사람들이 빈정댈 때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며 맞받아치곤 했다. 그런데 서울시가 좀 더 버텨줬으면 좋으련만 82년 그 허점을 인정하듯 복층으로 반포대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또 생각해보니 배가 지나가도록 다리의 일부를 살짝 들어올 때마다 차량 통행이 중단되면서 운전자들의 욕설이 도로 양쪽에서 튀었다. 일상의 흐름을 끊어주는 특별한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서울시는 다리 북쪽을 아치 모양으로 올려서 배도, 차도, 중단 없이 지나갈 수 있도록 새로 공사를 했다.

그래도 내가 고교를 다니던 동안은 잠수교가 단층으로 남아 있어서 맘껏 사랑할 수 있었다. 서빙고동 쪽에 있는 중경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어느 날 용산 시외버스터미널을 출발하는 완행버스들이 무슨 사연에서인지 우리 학교 옆구리를 지나가는 걸 알게 됐다. 손을 드니 섰다. 이 버스는 잠수교를 통과해서 복잡한 행로를 거쳐 신림동을 지나갔다. 나는 신림사거리에서 내려 신대방동에 있던 집까지 걸어가곤 했다.

그 때 학교버스가 있어서 집 근처까지 태워다 주곤 했지만 나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아침에는 142번 신촌운수 버스를 타고 노량진역으로 가서 거기서 경부선 열차를 타고 용산역에 내려서 거기서 다시 교외선으로 갈아탔다. 그런 뒤 서빙고역에 내려 학교로 걸어가곤 했는데 한강철교를 건널 때 불과 한 정거장이었지만 기분을 내기 위해 꼭 삶은 달걀에 초정리 천연사이다를 사먹곤 했다. 그러니까 통학길에 버스는 시내와 시외, 철도는 열차와 전동차를 골고루 섭렵하며 학교를 다닌 셈이다.

특히 비가 많이 오면 시외버스는 잠수교를 건널 수가 없어 한남대교까지 우회했다. 그 때는 150원인가, 같은 돈을 내고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으니 비가 많이 와서 잠수교가 잠기기만을 기다렸다. 야, 오늘 또 돌아간다.

시간에 대한 느낌이 지금과 달랐던 것 같다. 지금 만약 길을 그렇게 돌아가야 한다면 그 완행 버스를, 어처구니 없는 다리를 설계한 서울시를, 죄 없는 잠수교를 원망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언제나 직선거리만 생각하고 사니까.

잠수교는 한강 쓰레기 청소까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지금은 마치 일부러 길을 휘돌아가던 학창시절로 복귀한 것 같다. 어떤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들뜨던 시절. 그래서 때로는 인생을 낭비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던 시절. 지금은 자전거를 끌고 나오면서 아침에 길에서 어떤 일이 있을지 호기심을 품고 출발한다.

잠수교 끝에 계단이 나와서 일단 자전거를 들고 터널 안으로 가서 다시 자전거를 타고 인도를 따라 80m쯤 가니 다시 오르막 계단. 동빙고동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에 만들어진, 눈물 겨운 공원이 있다. 공원을 타고 넘어 지금은 한강 중학교로 바뀌어버린 옛 고교 앞을 지나 이태원 입구까지 갔다. 어디로 갈까. 직진하면 남산 3호터널이 있을 테고. 통과가 어려울 듯. 그럼 미 8군 부대 담벽을 타고 후암동으로 갈 길이 있을까. 있을 테지만 남산 중턱까지 올라가야 한다. 이 루트는 나중에.

그럼 얌전히 국방부 쪽으로 좌회전해서 남영동을 따라 도심으로 진격하자. 국방부 앞길은 인도에 자전거 주행로가 있다. 그리고 전쟁기념관을 만나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육군본부가 있어서 삼엄한 경비가 쳐져 있던 곳을 태연히 들어간다. 시간 여행하는 기분이 난다. 차단목 사이를 통과해 기념관 안의 외곽도로에 접어들자 방망이를 든 전경들이 쳐다본다. 이들은 전쟁기념관과 인접한 미군부대를 24시간 경비하고 있다.

동이 터오면서 주위의 사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름대로 세심하게 전시했겠지만 전쟁에 시달린 나라 아니랄까 내 눈에는 무기들의 패총처럼 보인다. 원래 생길 때부터 나는 평화기념관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결국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말이다. 야포에서부터 탱크, 전투기, 수송기들이 즐비하다. 도심에 이렇게 무기를 부려놓은 놓은 곳도 없을 것이다.

전쟁 기념관에서 나와 미 8군 담벼락을 타고 가다 남영동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갈월동, 서울역으로 인도를 따라 갔다. 출근길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도심 자전거 타기는 빨리 가는 것보다 천천히 가는 법을 배우는 게 더 중요하다. 만약 자전거를 타고 통근하고 싶다면 집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부터 연습할 필요가 있다.

홍은택/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 편집국장
인파를 요리조리 뚫고 나가려면 때로는 잠시 멈춰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 때 발을 땅에 짚으면 계기를 상실하고 출발할 때 품이 더 든다. 자전거가 멈춘 상태에서 페달에 발을 안 떼려면 고도의 집중과 평형이 요구된다. 숨도 때론 멈춘다. 등 허리에 땀이 배어나온다.

서울역을 거쳐 순화동 <중앙일보>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덕수궁으로 가는 샛길로 들어갔다. 서울시립미술관 앞에서 미 대사관저와 덕수궁 사잇길을 따라갔는데 아름드리 나무들이 치솟은 뒷담길은 언제나 향수어린 추억이다.

그리고 광화문 새문안 교회를 거쳐 회사에 드디어 도착했다. 이제 아침 햇살에 도시의 연무가 퍼져나간다. 아침 여행을 무사히 마치자 엔도르핀이 솟구친다. 시계를 보니 8시20분. 1시간50분이 걸렸다. 좋긴 한데 이렇게 매일 다닐 수 있을까. 근데 저녁에는 어떻게 집에 가지?

홍은택/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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