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촬영한 서울의 상공에 끼인 검은 띠. 특별히 공해가 심한 날은 아니었지만 정확히 북한산 높이만큼 대기의 색깔이 검다. 자동차 배기가스 때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탈수록 검은 띠를 엷게 하고 가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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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층 빌딩 외제차 사이를 뚫고
강남을 자전거로 유유히 누비고 싶은 충동
장맛비는 내게 ‘강남 관통 코스’ 모험을 제공했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는 날씨의 변화가 두렵지 않다. 오히려 기상변화는 새로운 경험을 예비한다. 지난 여름 7월28일의 일이었다. 여느날처럼 자전거를 끌고 나왔고 영동대로에서 양재천 입구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양재천이 싯누런 흙탕물에 잠겨 있어 자전거도로로 갈 수 없었다. 전날 호우경보가 내렸고 경보대로 홍수가 났다. 세찬 비가 계속 퍼부었고 나는 순간 갈 곳을 잃었다. 덕분에 처음으로 차도만 이용해서 자전거 출근을 하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이전부터 해보려고 했다. 자전거가 교통수단이라고 선언한 뒤부터 자전거도로를 버리고 차도로만 출근하고 싶었다. 시간을 의식하게 되면서 광화문까지 가는 지름길을 찾아보고도 싶었다. 아무래도 자전거도로는 강남을 휘돌아간다. 자동차가 실어 나른 신기루 같은 도시문명인 강남을 자전거로 유유히 누비고 싶은 충동도 잠재해 있었다. 화려한 외관의 초고층 빌딩 밑으로, 도로를 가득 메운 외제차들을 뚫고 뽐내며 가고 싶었다. 그래도 마음만 있었지,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사고 걱정을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맛비는 내게 좋은 모험의 계기가 됐고 강남 관통 코스가 개발됐다. 그 뒤로 눈이나 비가 오면 나는 강남을 여행하는 날로 삼는다. 내가 태어나던 해 서울은 두 배가 됐다. 서울시 행정구역은 1963년 1월1일을 기해 268.353㎢에서 오늘날의 면적인 605㎢가 됐다. 중랑 강동 송파 강남 노원 양천 강서 구로구 금천구 등 오늘날 9개 구에 해당되는 지역이 서울로 편입됐다. 그 이후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서울의 변화를 요약하면 이렇게 늘린 빈 땅에 7백만 명을 추가 수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가장 극적인 사건은 강남의 개발이다. 합쳐서 3만명이 넘지 않던 강남 서초구의 인구가 지금은 90만명쯤 된다. 단지 인구만 는 게 아니다. 경제 중심이 강남으로 이동됐다. 근대화 과정이 압축적이었던 만큼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한 지역의 우위가 도드라진 예도 드물 것이다. 이곳은 르 꼬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의 이상이 기형적으로 실현된 곳이다. 고층화로 밀집도를 높이되 남는 여백에는 공원과 같은 자연 휴식시설이 넓게 자리잡도록 한다는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이론은 한국 건축가들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도시설계이론이다. 그런데 강남에는 고층화만 이뤄지고 여백은 없거나 있어도 밥집과 술집으로 채워졌다. 그런데도 강남의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많은 것은 그나마 강남 정도의 생활환경을 갖춘 곳도 없다는 점(그러니 더 비극적이다)과 부자들의 군집성 때문일 것이다.
강남 개발사 거슬러올라가는 길 수서에 있는 우리 집에서 동호대교를 건너기 위해 강남을 헤집어 가는 길은 기형적 강남개발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좋은 답사다. 8백만평에 이르는 강남을 관통해 보면 웬만한 신도시보다 면적이 크지만 도시의 중심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랜드마크적 건물이나 중심지가 따로 없다. 석쇠형 도로망으로 구획된 사각형의 대지에서 사무용 건물들과 아파트 단지들은 사적 권리와 이익을 마구 주장하는 형태로 다양성을 보이며 무질서하게 포진해 있다. 한국 도시설계의 단골메뉴인 좌청룡 우백호와 같은 풍수지리설조차 감안되지 않은 개발이었다. 강남의 탈중심성은 오히려 강남 곳곳에서 개발이 추진되는 것을 방임하는 역동성을 낳았다. 그래서 실제 중심은 강남의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고 있다. 처음 주거공간으로 개발될 단계에서는 반포와 압구정동, 룸싸롱과 같은 술집의 유흥문화로 개발이 촉진된 단계에서는 신사동, 사무공간으로서 물적 기반을 확충할 단계에서는 테헤란로의 역삼동, 거기서 축적한 부로 다시 주거공간이 고급화되는 단계에서는 도곡동, 그리고 부를 세습하기 위한 사교육 공간의 진화단계에서는 대치동이 각각 각광을 받았거나 받고 있다. 내가 가는 길은 그 역순이다. 아구탕집 들어서자 신사동 퇴색 강남의 초기 개발을 이끈 쌍두마차는 강남의 서단과 동단에 있는 반포와 잠실이었다. 1970년대 초반에 반포, 70년대 중반에는 잠실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섬으로써 오늘날 강남의 동서 외연이 정해졌다. 내 기억 속에 처음 강남이 들어온 것은 75년 신대방동에 살 때 옆집에 살던 쌍둥이 친구가 반포로 이사를 가면서부터. 공군에 다니던 아버지가 예편해서 대한항공의 기장이 되면서 월급이 많아지자 좋은 동네로 이사를 간 것이다. 그 집에 한번 놀러 간 뒤 다시는 쌍둥이 친구를 보지 못했다. 단지 동네만 달라진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시 반포는 아이들 세계에서는 아슬아슬한 통나무 미끄럼틀이 있는 놀이터와 최유리라는 아역배우가 살고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통나무를 타고 좌우로 움직이는 미끄럼틀은 몇 명 떨어져 죽고 난 뒤 줄이 묶이고 철거됐다. 최유리의 아파트 입구 우편함에는 팬레터 몇 장 쌓여 있던 기억이 난다. ‘고층화, 여백엔 공원’ 르 코르뷔지에 도시설계론을
강남은 고층만 적용하고 여백엔 술집·밥집 ‘기형 개발’
중심점도 없어 개발점은 계속 남진한다 우리도 5년 뒤인 80년 방배동 삼호아파트로 이사함으로써 드디어 강남주민의 대열 말미에 합류했다. 당시 방배동은 반포의 배후지에 있는 한적한 신흥 아파트 단지였다. 얼마 안 있어 아리따운 자매가 운영하던 글벗 서점이 카페로 바뀌고 아버지와 탁구치던 지하상가의 탁구장이 술집으로 바뀌었다. 방배동 카페골목이라는 말이 생겼고 모텔들이 우후죽순 등장해 밤의 즐거움을 완성했다. 한때 방배동은 지금의 청담동 카페의 성가를 유지했다.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에도 불구하고 한강에서 낚시는 계속된다. 사진은 탄천과 한강의 합류지점으로 팔뚝만한 잉어가 잡힌다. 그 건너편에서는 제2의 강남이 건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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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아메리카 자전거 여행〉〈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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