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암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집필했던 유배지 모래미마을의 앞바다.
|
남해 흑산도
옛 선비들 한 서린 검푸른 바다동백은 잊으라는 듯 천지에 피고
앞바다엔 홍어잡이 바쁜 손놀림 “흑산도리 문암산은 들어갈수록 나무가 많고/ 흑산도리 바닷가는 경치도 아름답다/ 가지 많은 소나무 바람 개일 날 없고요/ 자식 많은 부모 속 편한 날 없어라/ 싫고든 말어라 너 한사람뿐이냐/ 산 넘어 산이 있고 강 건너 강이 있다/ 흑산도야 박도야 이름난 흑산도야/ 풍란꽃 내음에 향기가 나는구나/ 아리랑 순자야 몸단장 하여라/ 내일 모래리 약혼자 선보러 온단다”(흑산도타령) 목포여객선터미널을 떠난 쾌속선이 한 시간 가량 바다를 갈라 ‘하트 해변’으로 잘 알려진 비금도와 도초도에 사람과 짐을 내려놓기 무섭게 서둘러 서남해로 뱃길을 잡는다. 또다시 파도 높은 망망대해를 헤매기를 한시간 가량, 저 멀리부터 검은 섬 하나가 점점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가 귀에 익은 노랫가락을 흥얼거리자 뱃멀미에 얼굴이 노랗게 들뜬 할머니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신명나게 뒤를 받친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오는데/ 못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가수 이미자가 불러 흑산 홍어와 함께 이미 흑산도 신화가 되어버린 흑산도 대표노래 ‘흑산도아가씨’다. 흑산도.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예부터 육지와 멀리 떨어진 데다 뱃길마저 험해 손암 정약전, 면암 최익현 등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귀양지였다. 하지만 이제는 천연보호구역인 홍도를 비롯해 다물도, 대둔도, 영산도, 태도군도, 가거도, 만재도 등 크고 작은 100여개의 아름다운 섬을 거느린 다도해를 대표하는 관광지다.
요즘 흑산도에는 섬 곳곳에 동백꽃이 활짝 피었다.
|
봄을 맞아 동백꽃이 만개한 요즘 흑산도 앞바다에서는 겨울잠을 깬 홍어잡이가 한창이다. 해가 뜨기 전 꼭두새벽부터 예리항에는 사나흘간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홍어잡이배들이 포구에 닿으면 중개인들과 근처 식당 주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경매에 나서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미식가들의 입맛을 돋우는 홍어회.
|
홍어는 미끼가 없는 주낙으로 잡는데 쉽게 상하므로 포구에 배를 대자마자 경매에 들어간다. 8킬로그램 이상 1등급은 40만~50만원이며, 가장 최하위인 4등급은 10만원대 이하로 팔려나간다. 이렇게 육지로 올라온 홍어는 홍어회와 홍어찜, 홍어탕, 삼합 등 독특한 전라도 음식으로 탈바꿈해 미식가들의 입을 만족시킨다. 홍어는 해독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서 소화에 도움을 주고 장 청소 기능까지 갖고 있다. 또한 기관지에도 좋아 남도의 소리꾼들이 목소리를 탁 트이게 하려고 홍어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봄철 새벽 예리항에는 이 섬의 명물 ‘흑산 홍어’를 경매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
예리항에서 차를 빌려 섬 일주에 나섰다. 흑산도는 아름드리 동백숲과 후박나무숲, 너도밤나무숲 등 윤기있는 상록활엽수들이 섬을 울창하게 뒤덮고 있어 사철 푸른 빛이다. 깎아지른 고갯길에서 내려다보이는 앞바다 또한 푸르다 못해 짙푸르게 검은색을 띠고 있다. 왜 흑산도인지가 실감난다.
사리마을
|
흑산도 남동쪽 끝 선유봉 자락에는 ‘모래미’라는 예쁜 옛이름을 가진 사리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조선 말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둘째형 손암 정약전이 천주교 포교활동을 하다 신유사화 때인 1801년에 옛 흑산포에 붙잡혀 들어와 한해 전에 이웃 우이도에서 일흔일곱해의 삶을 마칠 때까지 14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는 유배생활을 하면서 남서해안에 서식하는 155종의 물고기와 해산물을 채집해서 어류학 총서 〈현산어보〉(자산어보)를 집필했다. 모래미 언덕에는 그가 후학을 가르쳤던 사촌서당(복성재)이 복원돼 남아 있다. 모래미로 가기 전 여티미(천촌리)에는 정약전과 함께 흑산도를 대표하는 큰 인물인 면암 최익현의 유배지가 있다. 그는 강화도 조약에 반대해 도끼를 메고 ‘왜적을 물리치지 않으려면 신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려 흑산도로 유배됐다. 면암의 제자들이 세운 유허비 뒤편으로는 면암의 친필인 ‘기봉강산 홍무일월’이라는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주변에는 면암의 혼인 듯 붉게 물든 동백숲이 우거져 있다.
흑산도의 절경
|
모래미 뒤편 한다령을 넘어 비포장도로를 따라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끼고 해안일주도로를 달리면 아담한 포구마을뿐만 아니라 바람이 심한 날 파도가 바위 가운데를 통과하는 신비로운 구문여(구멍바위), 마치 정교하게 한반도 지도를 파놓은 듯한 ‘지도바위’ 등 흑산도의 절경들과 마주친다. 지도바위에 이어 마리(마을)를 지나면 흑산도에서 가장 전망이 빼어난 상라산 전망대와 유명한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를 만난다. 해넘이와 해돋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까지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탁 트인 다도해를 배경으로 흑산항과 대장도, 소장도, 횡섬, 가도, 영산도, 홍도 등이 빚어내는 절경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흑산도의 절경
|
상라봉에서 흑산 앞바다를 굽어보면서 흑산면 소재지인 진리로 내려가는 열두굽이 고갯길은 야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길 주변에는 온통 동백숲으로 뒤덮여 있는데 만개한 꽃도 아름답지만 이른 아침 햇볕을 받아 영롱한 빛을 내뿜는 동백잎들의 모습도 볼거리다. 진리에는 마을 사람들이 ‘처녀당’이라 부르는 성황당이 있다. 피리 부는 청년과 그를 사모했던 처녀귀신의 전설이 서린 이곳에서 해마다 정월 초에 마을의 번영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성황당 뒤편으로는 소나무와 동백나무, 해장죽이 무성하게 우거진 해안산책로가 나 있어 호젓한 산책을 즐길 만하다. 흑산도/글·사진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