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현 기자. 우리 민족 고유의 선도수련인 기천(氣天)을 하는 모습을 어느 누가 찍어 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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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 전부 옳은 것입니까. 성서가 쓰여지고 주 텍스트로 선정되는 과정이 수많은 의혹에 둘러싸여 있는 기독교 성서는 말한 것도 없고, 불교의 역사에서도 오류는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기록보다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는 얘기를 믿는 편입니다. 제가 8년 전 부처님이 태어난 네팔의 카필라성을 찾아가보니, 카필라성 주변 마을 사람들은 아직까지 나무 바퀴로 된 소수레를 끌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은 2500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불교의 기록엔 거의 없지만, 그 인근 히말라야 속 마을에선 부처님이 젊은 시절 이곳에서 수행했다. 또 저곳에서 무엇을 했다는 얘기들이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는 역사의 기록보다 그들의 구전이 훨씬 사실에 부합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기록은 한번 오류를 빚으면 수정되지 못한 채 정설로 굳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오류는 오류일 뿐입니다. 제가 여러분이 꿈에도 오류라고 생각하지못한 채 믿어왔던 사실 하나를 예로 들어볼까요. 불교에선 부처님의 설산 고행을 기정사실화하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의 여덟가지 거룩한 전기를 기록한 석가여래팔상도에도 설산수도상이 있습니다. 큰 절에 가보면 석가여래팔상도가 벽화로 그려져있습니다. 여러분도 부처님이 설산에서 고행하고 있는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한 둥게스와리산은 눈이 오지 않는 곳입니다. 설산인 히말라야에서도 수천킬로 떨어진 곳입니다. 전정각산이라고 불리는 그 산 아래 우리나라 정토회에서 세운 수자타아카데미가 있는데, 그 지방은 겨울에도 날씨가 영하로 내려간 적이 거의 없습니다. 눈이 아예 내리지도 않는데, 어떻게 히말라야 같은 설산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한 번 잘못된 기록이 정설로 굳어진 이후 누구도 의심치않고 사실로 믿어온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부처님이 출가 이후엔 설산에서 고행한 적이 없지만, 출가 전에 설산에서 고행했다고 봅니다. 부처님이 태어난 카필라성은 히말라야에 가깝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날 때 와서 부처님의 미래를 예언한 아시타 선인도 바로 히말라야 도인 아닙니까. 부처님은 어린 시절 외가와 아주 가깝게 지냈습니다. 생모인 마야부인인 부처님이 태어난지 7일만에 열반했지만, 그의 이모가 양아머니가 되어 그를 돌보았고, 그의 무술 사부는 외삼촌이었습니다. 이모와 외삼촌이 그를 키운 것입니다. 제가 카필라성에서 부처님의 외가집이 있는 곳까지 서너시간 차를 타고 가보니, 그것은 계속 설산을 보면서 가더군요. 설산이 지근거리에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10대에 성문 밖에 나가서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근본적인 종교적 고뇌를 시작하게 됩니다. 저도 근본적인 삶의 고뇌가 시작되었을 때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뛰쳐나왔는데, 부처님은 10대 때 사문유관을 해서 근본적인 고뇌가 시작되었는데, 무엇을 하고 주저앉아있었겠습니까. 스물여덥살에 출가할 때까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이미 고뇌는 시작되었는데요. 그도 그 고뇌를 풀기 위해서 인근 도사를 찾아 헤맸을 것입니다. 스물여덥살때까지 가만이 앉아있었을리 만무한 일이지요. 그러니 출가하기 전까지 인근 히말라야 설산에서 도를 닦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때 설산 고행을 한 것이지요. 그런 얘기들이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는데, 저는 그런 구전을 훨씬 사실적인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출가 후 눈도 내리지않는 둥게스와리산에서 수행한 그가 설산 고행을 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 아닙니까. 그처럼 기록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 믿을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성적 역사도 정사엔 거의 기록이 없지만, 저는 삶 속에, 우리의 문화 속에, 말 속에 녹아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기록보다는 민중들의 삶 속에서 그 뿌리를 찾는게 옳고 정확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천손 민족이라는 의식이 강했던 영성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말 속엔 영성적 비밀들숨어 있습니다. 무심코 쓰는 말들 속에도 다 도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말은 중요한 것을 두번 강조합니다. 어법상으로는 틀리지만 역전 앞이라고 쓰는게 우리의 말 습관입니다. ‘도무지’란 말을 보십시오. 도(道)에 무지(無知)하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하는데, 도무지 속에 알 수 없다는 말이 다 포함돼 있지만, 두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란 말도 보십시오. 도(道)의 큰(大) 본체(本體)라는 것이지요. ‘도대체 이게 뭘까’라고 하는데, 도대체 속엔 이게 뭘까라고 어떤 화두를 들고 의심하는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을 강조하느라 반복된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무심코 쓰는 도무지나 도대체란 말 속에도 도와 진리로 이끄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심청전을 보십시오. 그런 얘기들 안에 영성이 담겨있습니다. 심청(心淸)은 ‘마음이 맑은 사람’입니다. 심봉사는 무엇이겠습니까. 심봉사(心奉事)는 마음의 소경입니다. 즉 ‘마음이 어두운 사람’입니다. 심청은 ‘마음이 맑아진 사람’이 ‘마음이 어두워진 사람’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어두워지면 자기 밖에 모릅니다. 그러니 심봉사는 앞뒤도 따져보지 않고 공양미 3백석을 시주하겠다고 약속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은 자기를 초월한 사람입니다. 그는 깊은 명상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깊은 명상을 해본 사람은 체험해보았겠지만, 양미간의 사이에 있는 ‘인당’이 깊은 바다속처럼 맑고 푸르러집니다. 그 인당수에 자신을 던지게 될 때 그의 정신 세계가 달라집니다. 환골탈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상징하는 연꽃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 다시 태어났을 때 다른 사람 즉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도 거듭나게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청전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비의입니다. 그런 얘기들이, 앞에서 말한 말 뜻은 누구에게 들은 얘기나 읽은 얘기가 아닙니다. 제 스스로 어느날 느껴지고, 깨달아진 것들입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의 말과 노래들 속엔 우리의 영성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영성적 삶을 알아보려면 우리 자신을 잘 보면 됩니다. 우리의 유전자 속에 그들의 삶이 모두 녹아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와 관습 속에 그들의 정신적 뿌리가 그대로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건너온 기독교조차도 우리의 영성이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선도와 함께 무속은 우리의 주요 영성생활의 일부였습니다. 무속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끈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불교나 유교보다 무속을 훨씬 배척했지요. 왜 그랬겠습니까. 무속과 동학으로 이어받은 영성적 기류를 대체하면서 이땅게 급속히 정착한 기독교는 무속과 가장 유사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부흥회 전통과 오순절 전통으로 오늘날 대부흥을 이룬게 한국 기독교입니다. 그런 기독교의 모습은 무속과 굉장히 유사하지요. 불교나 유교와는 코드가 다르니, 서로 경쟁할 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나 무속과는 정서적으로 유사하니 직접적인 경쟁 관계입니다. 그래서 무속을 미신과 사탄으로 가장 경원시하는 것은 멀리 있는 것보다 가까이 있는 경쟁자에게 배타적인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다이나믹 코리아는 무속적인 것, 부흥회적인 것, 그런 신바람의 영성에 그 원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엔 세계 어느나라보다 아름다운 수려한 산수의 영향과 사계절의 변화무쌍함이 정신 세계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처럼 쉽게 손에 잡히지않는 게 우리의 영성의 바람 같은 속성이기도 합니다. 바람이 즉 기(氣)아닙니까. 우리나라는 그런 기와 유불선, 무교, 기독교 등 다양한 영성 세계가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배타적이기보다는 조화롭습니다. 텔레비전에서도 사대주의 역사가들의 기록에만 의존하거나, 왕궁과 귀족등 지배층의 모습들만을 주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안목이 전체를 보지 못하는 때문입니다. 당대의 삶의 모습과 정신 세계를 그들을 통해 모두 엿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허구적 시나리오로 만든 ‘웰컴 투 동막골’ 같은 영화가 옛 사람들의 모습을 좀 더 잘 표현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영성세계를 탐구하는 분들이고, 앞으로 영적 지도자가 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기존의 역사적 기록에만 너무 의존하거나 사대주의에 빠져 중국과 인도, 서양 등 외국의 정신 세계에만 경도되지말고, 여러분과 우리의 삶과 문화와 말과 정신 속에 내재해 있는 우리 영성을 발견해 보십시오. 오직 한 나라, 한 지역에 하나의 사상이 지배하는 대부분의 나라들과 달리 우리나라는 세계의 모든 종교와 사상과 영성적 기류가 대해에 흘러들듯이 흘러와 있고 조화롭게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와 사상, 신념이 갈등의 단초가 되고 있는 세상에서 이 땅은 화해와 평화의 희망을 보여줄 수 있는 땅입니다. 이 땅의 영성 탐구자로서 그런 시대정신을 잊지마시고, 정진해서 세상에 희망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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