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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08 15:10 수정 : 2005.04.08 15:10

아쿠아 아트 브리지. 이주노 기자 jooroad@economy21.co.kr



모두들 서울은 삭막하고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없는 것을 애달파 하는 대신 있는 것을 찾는 방법도 있다. 잡을 수 없는 것, 멀리 있는 것만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의 발 밑에서 새로운 것을 재발견했을 때 느끼는 기쁨과 놀라움을 표현하는 말, “아아, 여기 있었구나!” 남들 다 가는 봄나들이, 오히려 서울 도심으로 눈을 돌린 김맹괄씨 가족의 특별한 도심 기행.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 여겼던 서울에도 보물이 숨겨져 있었다.

봄은 갑자기 찾아왔다. 아무 생각 없이 상춘객 대열에 끼어 딸기잼 같은 도로에서 봄날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라곤 털끝만치도 없는 김맹괄 차장. 그는 좋게 말하면 발상의 전환을 즐기는 사람이고, 비틀어서 말하면 남 다 가는 길 혼자서 거꾸로 가길 좋아하는 사람이다. 예의 기질을 십분 발휘한 그가 기획한 봄나들이 이벤트는 일요일 하루 동안 한가한 서울 도심에서 어슬렁거리며 세계적인 수준의 건축물을 감상하는 것이다. 물론 몇 시간 동안 웹 서핑에서 건져올린 싱싱한 정보와 함께 말이다. 일요일 오후, 내심 마뜩찮아하는 고 여사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두 아들을 이끌고 도심 기행을 떠나는 겁 없는 가장 김맹괄씨의 단호한 선언, “내가 준비 좀 했어!”

■ 쇳대박물관 _ 자물쇠와 철의 어우러짐

대학로 쇳대박물관 입구, 4층 건물 중간이 텅 비어 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김맹괄씨의 작은 아들이 겁 없이 내뱉는다. “건물 바깥이 드러워.” 약간 조급해진 김맹괄씨. “그건 코르텐 강판이라는 재료 때문인데, 이게 말이지 녹슬기 시작하면 점점 강해지고 색깔도 짙게 변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맛을 낸다구. 봐, 여기 이렇게 오래되고 손때 묻은 자물쇠를 전시하는 건물로는 정말 잘 어울리지 않냐?” 묵묵부답인 아들 곁에서 고색창연한 자물쇠들을 보던 고 여사는 새삼 지난 일을 떠올린다. 자물쇠의 경상도 사투리인 ‘쇳대’에는 ‘살림의 이양’이란 깊고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살림의 이양이라? 해묵은 고부간의 딜레마가 꼬리의 꼬리를 물고 나오고 그 꼬리를 김맹괄씨가 재빨리 낚아챈다. “축구선수만 국가 대표가 있는 게 아냐. 건축가 중에서도 국가 대표급 건축가가 있지. 바로 이 건물을 설계한 승효상이란 선생님이 바로…” 이번에는 큰 녀석이 낚아챈다. “그럼 월드컵에 나가 메달 땄어?”, “(주저하다가)…, 월드컵은 아니어도 그 비슷한 데서 주는 상을 받기도 하지….” 김맹괄씨는 고 여사를 쫘악 째려 보았다. 그래도 미동도 않던 고 여사, 2층에서 발걸음을 딱 멈추는 게 아닌가. 작은 토기들이 유리 칸막이를 가득 메우고 있는 유리벽, 봄날 햇빛을 받은 따스함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 아쿠아 아트 브리지 _ 스펙터클 육교

한강을 건너 20분 만에 도착한 예술의전당 앞, 평일엔 어림없는 일이지만 일요일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심의 여유가 있다. 아쿠아 아트 브리지는 보통의 육교와는 다르다. 그러나 육교로만 사용되고 있다. “와아~ 멋있다”를 연발하던 작은 녀석도 다리 중간에 들어서자 고 여사 손을 불끈 거머쥐고 놓을 줄 모른다. 결코 낮지 않은 높이, 사방으로 오픈된 다리 구조를 감안하더라도 발 아래로 쌩쌩 지나가는 차들의 행렬은 어지럼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주변에 새로 건설된 초고층 아파트와 우면산을 연결시키기 위해 건설된 아쿠아 아트 브리지는 이곳을 지나는 운전자와 산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우면산으로 통하는 다리 끝에 위치한 삼각형의 쉼터, 거대한 원반을 덮고 있는 유리 패널로 나오는 폭포수, 부드러운 합성 목재로 깐 바닥재, 밤에는 블루 빛을 내는 워터 스크린 등 다리로서는 이만한 스펙터클이 따로 없다. “아빠, 랍스터가 뭐야?” 진즉에 김맹괄씨는 다리 아래에 있는 랍스터 전문 레스토랑을 못 본 척하고 있었다. “그건 이 다리와 비슷한 곤충 이름이야.” 이번에는 큰 녀석과 고 여사가 듀엣으로 김맹괄씨를 째려 본다. 다비드 피에르 질리콩은 다리 설계를 할 때 주변 환경도 고려했어야 했다. 세상에, 랍스터라니! 에구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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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파이낸스타워 _ 차갑고 모던한 아름다움

역삼역에서 삼성동으로 가다 보면 포스코 빌딩 못미처 오른쪽에 동부파이낸스센터가 보인다. 건물 기둥부터 비스듬하고 건물 전체가 들쑥날쑥하며 스테인리스 스틸로 포장돼 차가운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지 건물 앞에 검은 조약돌로 만든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브라운 기운이 살짝 도는 바닥재, 내부 엘리베이터 입구도 따뜻한 나무 질감을 살렸다. 무엇보다 까다로운 고 여사의 취향에 부합한 건 바로 자동 에스컬레이터! 사람이 다가서면 자동으로 움직이고 사람이 내리면 자동으로 멈추는 에너지 절전형 에스컬레이터가 그녀 마음을 쏙 빼앗았다. 경비 눈치 봐가면서 간신히 에스컬레이터에서 세 사람을 떼놓은 김맹괄씨는 그래도 이 모던한 건물이 차갑고 딱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와! 꽃이다!” 일제히 돌아보니 과연 꽃은 꽃이다. 철로 만든 꽃이어서 그렇지. 동부그룹 마크를 오렌지 빛 철 구조물로 만든 조각품을 녀석은 꽃이라는 거다. 그나마 차가운 건물에 생기발랄한 꼭지점을 찍은 듯한 기분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글쎄, 고 여사. 꽃이 여전히 사람보다 아름답다는 게 내 생각이다!’

■ 아이파크타워 _ 추상 화가의 캔버스인가

동부파이낸스타워에서 코엑스를 끼고 좌회전을 하면 사거리 끝 오른쪽에 아이파크타워가 있다. 빌딩 전체가 마치 추상화가의 캔버스처럼 선과 색채가 자유분방한 이 건물을 못 보고 그냥 지나가기란 힘들다. 아니, 바로 곁에 있는 한국전력 마당에서 벌어지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지나칠 수도 있겠다. 김맹괄씨도 차 안 여론에 밀려 차를 멈추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일련의 무리들을 근심스럽게 지켜봐야만 했다. 저들 부모는 얼마나 속이 탈까? 김맹괄씨 속도 편치만은 않다. 고 여사가 시종일관 소지섭 머리를 한 진행자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게 아닌가.

빨간 철제 현관문을 열고 아이파크타워에 들어서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만큼 건물 외관이 이질적이다. 현대해체주의 건축의 대표 주자인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설계한 아이파크타워는 건물 앞쪽의 거대한 원형 프레임과 바닥에서 옥상으로 향하는 사선 막대가 인상적이다. 타워팰리스처럼 주거 공간이 목적인 건물이라 일반인 공개 불가이지만 도심 기행에 지친 일가족을 쉬게 해줄 공간은 있다. 1층 카페는 건물 컨셉트와 잘 맞아떨어진다. 빨간색 타일을 이어 붙인 뿌리 깊은 나무 기둥, 아이들이 좋아하는 슈프림 드링크, 단맛이 적은 케이크와 커피는 투명한 바깥 풍경을 음미하기엔 더없이 적격이다. 코엑스 주변의 메탈릭한 분위기와 속칭 ‘예쁜 건물’이 주는 조화가 이 불투명 유리창 안에 모두 담겨 있다.

■ 갤러리아 웨스트 _ 하늘에서 별이 내리네

어둑어둑한 기운이 몰려오는 해질 녘에 도착한 압구정 거리. 마치 비단잉어처럼 우아한 갤러리아 웨스트의 유리 디스크들. 4330여개의 디스크에 서서히 라이트가 켜지면 화려한 컬러의 향연이 시작된다. 압구정의 밤은 갤러리아 웨스트의 불빛과 함께 시작되고 끝이 난다. 라이트가 켜지는 순간, 각종 거리 공연이 시작되고, 길 건너 트렌디한 노점상들도 나름대로 준비한 물건들을 쏟아놓는다. 하늘에서 별이 내리고 봄꽃이 피어나는 환상적인 비주얼 쇼가 펼쳐지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심하고 이방인만 감탄을 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방인 티를 내지 않는다. 그저 바라만 볼 뿐….

■ 씨네시티 _ 원형 프레임 안의 서울 야경

여기까지 와서 떡볶이에 가정식 백반이라니…. 갤러리아 앞 사이 골목을 훤하게 꿰뚫고 있는 김맹괄씨의 진가는 이럴 때 유감없이 발휘된다. 로데오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걷다가 도착한 씨네시티. 인터넷으로 예약한 영화표로 두 아들을 영화관으로 밀어넣었다. 고 여사의 재촉으로 들어간 화장실에서 녀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좋은 화장실이다!” 마치 거실처럼 넓은 화장실에서 원형 창문으로 내려다보는 야경이 마냥 신기한 듯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를 것이다. 지금부터 그들이 봐야 할 영화는 <아무도 모른다>이다.

아이들을 영화관으로 들여 보내고 건물 꼭대기 층에 있는 바로 올라간 두 부부. 모처럼 휘황한 서울 야경을 발 아래 두고 맥주잔을 기울인다. 씨네시티 설계자인 김석철은 시각 대상으로서의 건축물을 강조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통유리창으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이 오늘 따라 유난히도 친근하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김맹괄씨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세상이란 이토록 단순하다. 없는 것 가지려 하지 않고 주변에 있는 것을 되돌아보니 일시적이나마 완벽한 위로감에 젖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달콤한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뻔히 알면서도.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동안 마시는 시늉만 하며 눈치만 살피던 고 여사는 안전한 귀갓길은 자신의 몫이라는 사실을 바에 들어설 때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종업원에게 동부간선도로 진입로를 묻다가 김맹괄씨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고 여사, “왜 그래! 우리에겐 쓰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있는데… 음?”주정미/ 자유기고가 pkjoe@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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