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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와인과 비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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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토크] 홍대 ‘나물 먹는 곰’의 나물곰 세트
고추장 대신 특제 간장 넣어 쓱쓱…곰탕도 구수
할머니 손맛에 영화감독 아들의 멋, 감칠난 조화
서울 마포구 홍익대 근처, 이른바 '바이더웨이 사거리'라고 불리는 먹을거리 골목 안에 '어머니와 고등어'란 맛난 집이 있다. 5년 전에 생긴 이 집은 단골이 아니고서는 찾기가 힘들 정도로 꼬불꼬불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무인도처럼 외롭고 정처 없는 곳에 둥지를 틀었지만 홍대 먹자골목의 맛쟁이들과 예술 하는 친구들에게 단박에 인기를 얻었다. 소문난 맛 집이 그렇듯이 이 집도 방송과 종이매체를 꽤 탔고, 아나운서 이금희의 단골집이라는 둥, 가수 김창완의 노래를 따서 이름을 지었는데 그 마저도 단골이 되었다는 둥 여러 가지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다.
이 집의 맛은 차강득(77) 할머니가 빚어내고, 굴렁쇠처럼 잘 굴러가게 하는 일은 아들 김진한(40)씨가 한다. 차씨가 사는 집이기도 하는 이곳은 아들 김씨가 울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올라오면서 마련한 곳이다.
아나운서 이금희씨 단골집 주인이 옆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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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버린 자개농이 인테리어 소품으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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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요즘 이곳에선 요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아침 열시가 넘어가면 할머니가 사라지는 것이다. 할머니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에게 일하는 아줌마가 "할머니를 보려면 한 블록 지나 '나물 먹는 곰'에 가보라"고 귀띔해준다.
걸음을 재촉해서 그곳을 찾았다. 귀엽게 생긴 곰이 간판 속에서 반갑게 맞는다. 너른 2층 양옥집에, 작은 마당까지 있다. 단정하고 깔끔하다. 사람들이 버린 자개농이 다듬어져서 멋진 인테리어로 변신했고 2층에는 와인 잔들이 천장에 딸랑거린다. 이곳도 맛은 차씨가, 운영은 김씨가 한다.
차림표에서 가장 눈에 띈 요리는 '나물곰 세트'였다. '아사곰 비빔밥', '빨간곰 비빔밥', '노란곰 비빔밥' 세 가지가 있다. 아들 김씨는 "동네 백반집에서도 와인 한 잔 편하게 먹자"란 생각으로 만들었단다.
'빨간곰 비빔밥'은 비빔밥과 와인 한 잔, '아사곰 비빔밥'은 비빔밥과 아사히맥주,'노란곰 비빔밥'은 비빔밥과 국내 전통술로 구성돼 있다. 한 잔의 술과 비빔밥!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먹어보면 묘하게 통하는 구석이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차 할머니의 비빔밥 때문일 듯하다. 할머니를 붙잡고 비빔밥에 대해 물었다.
- 할머님 비빔밥엔 뭐가 들어가지요?
= 국산 고사리, 도라지, 콩나물, 무채, 버섯, 미나리나 시금치, 치나물이 들어갑니다. 달걀지단도 들어가고. 고향이 대구인데 고향에서 만들어 먹던 대로 만들어요.고향에서 가져오는 고춧가루, 참기름을 쓴다우. 참기름 인심은 좀 좋은 편입니다. 50병이 열흘을 못 버티지요. 김치도 직접 담가요. 지하에 큰 독이 50개 이상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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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할머니의 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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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과 술 한 잔의 조화는 할머니의 푸근한 고향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뻘건 고추장으로 비비지 않는다는 것도 쫀득한 조화에 한몫을 한다. 식탁에 나오는 할머니만의 간장을 넣어 쓱쓱 비비면, 나물마다 다른 질감과 결의 느낌들 살아난다. 다른 색깔로 꽃단장한 나물들이 입안으로 들어와 한 맛이 된다. '재크와 콩나무'의 하늘로 치솟은 넝쿨처럼 부드럽게 칭칭 감긴다.
와인을 한 모금 쏙 빨아서 푸르른 나물들 위로 붉은 색을 뿌린다. 장이모우의 '붉은 수수밭'의 색감처럼 식감이 붉게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 담백한 나물에 쌉싸르한 와인 특유의 향과 맛이 보태져서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비빔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언양한우 재료…화장하는 여인의 볼때기처럼 탱탱
할머니가 비빔밥만 맛보지 말고 곰탕도 먹어보라며 손을 잡아끈다.
- 무슨 곰탕인지요?
= 이 곰탕도 맛있다우. 경상도 언양한우를 재료도 씁니다. 우리 집이 원래 대구에서 넉넉한 집이었지요. 어렸을 때 고모님이 하던 대로 만들었습니다. 가족들 몸보신 생각으로 만드셨지요.
- 한우의 어떤 부위로 국물을 만드시는지요?
= 언양한우는 경상도에서 청도소와 함께 유명합니다. 소양(소위의 한 부위) 하나, 꼬리 하나, 족발 6개 넣고 끓입니다. 사태고기나 소의 혀를 넣기도 합니다.
- 끓이는 시간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 불로 조절하는데 내 감입니다. 모든 재료를 한꺼번에 넣고 끓이는데 보통 12시간 끓이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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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얀 국물이 고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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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은 소금을 넣지 않아도 맛나다. 싱거운 것이 감칠맛을 더 돋운다. 곰탕 위에 둥둥 떠다니는 고기는 화장하는 여자의 볼때기처럼 탄력이 있다. 여름비가 들이쳐서 쌀쌀해질 때 대청마루에서 따끈한 이 곰탕을 먹으면 여한이 없을 듯하다.
한창 미국 쇠고기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러운데 하필 곰탕인가 싶었다. 아들 김진한씨가 툭 답한다. "오히려 더 찾아요. 우리 집 한우에 대해 사람들이 믿으니까요."
거친 경상도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오는 차 할머니는 어릴 시절 밭에 일 나간 어머니대신 구부정한 허리를 기역자로 하고 밥상을 차려주던 우리네 할머니들과 같다.그 정겨운 기운이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만난 듯 따스했다.
한 전직 대통령 누이도 단골…둘째 가슴에 묻고 일로 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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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내는 주인 차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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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할머니의 고향은 대구다. 그는 35년 전에 할아버지가 작고하자 "공부 잘하는 세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기숙여관을 했다. "한 달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방 잡기 힘들었어요. 도민체전하면 다 우리 집에서 기숙하려고 했지요. 내 밥을 좋아했어요."
대구가 직할시로 바뀌면서 운동선수들의 발걸음이 예전만 못하 할머니는 버스기사들 밥을 해주는 기사식당을 했다. "버스 기사들이 다른 곳 갔다가도 일부러 내 밥 먹으러 북부정류장으로 왔지요"라고 할머니는 회상한다.
곁에 있던 아들 김씨가 한마디 거든다. "우리 어머니 김밥은 유명했지요. 울산 바닥에서 차 할머니 김밥을 모르면 울산사람이 아닙니다"고 말한다.
- 울산은 왜 가셨지요?
= 대구의 버스 기사식당이 너무 힘들었어요.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사기도 좀 당하고. 울산에 가서 시장거리에서 김밥을 말아 팔았습니다. 인기 좋았지요. 800~1000개 김밥주문이 들어오는 날은 졸면서 김밥을 기계처럼 말았습니다. 한 전직 대통령의 누이도 우리 집에서 김밥 많이 사갔지요. 교사였던 그이가 큰 행사 있으면 꼭 내 것을 찾았지요. 오빠가 당선되자 보기 힘듭디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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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할머니의 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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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버시는 것 말고 힘드신 것 없었나요? 큰 성공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공을 거두신 것 같은데?
= 둘째 아들이 6년 전 세상을 떴습니다. 제일 공부 잘 했던 아들이었는데. 독일주재 한 공사의 직원이었어요. 간이 갑자기 안 좋아지더니 가버렸어요.
그 상처를 꿰매고 메우기 위해 막내아들 김진한씨 곁으로 올라 왔단다. 할머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정신없이 일하니깐 잊을 수 있어서 좋아요. 젊은 사람들과 같이 하니 더 좋구요." 희미한 미소가 가슴을 더 저미게 한다.
아들 김씨는 독립영화 <햇빛 자르는아이>를 연출한 영화감독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선 미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이제 차 할머니는 이 아들과 이 아들을닮은 이들에게 포근한 맛으로 세상살이를 이어갈 것이다. (02-323-9930)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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