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5.29 18:49
수정 : 2008.06.0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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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라면81번옥>의 ‘미소라멘’(왼쪽)과 ‘소유라멘’(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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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순례] 서울의 일본 라멘집들
한국은 '떼우기'지만 일본은 국가대표 요리
‘일본맛’ 그대로 속속 서울 상륙…체인점도
한 선배가 밥상 앞에서 흰소리를 한다. 인간의 본능 중에 성욕과 식욕은 닮은 구석이 많아서, 이불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시간은 식사를 즐기는 시간과 비례한다고. 그 선배는 천천히 숟가락을 뜨면서 이미 후딱 밥공기를 비워버린 옆자리 동료에게 야비한 미소를 날린다. 진실을 알 도리는 없지만 천천히 밥을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느리게 먹기를 작정해도 지키기가 쉽지 않은 음식이 있다. 라면이 그렇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꼬들꼬들한 라면을 밥상에 올려놓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라면은 끼니 같은 간식이 필요할 때, 후딱 배를 채우고 서둘러 떠나야 할 때 제격이다.
하지만 인스턴트식품이라는 꼬리표 탓에 맛의 세계에서 라면은 찬밥신세다. 세밀하게 탐구하고 음미하고, 심지어는 찬사의 대상이 되는 음식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우리 식생활의 현실이다. 하지만 일본으로 건너가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일본인들은 초밥과 함께 라멘(일본라면)을 제일의 요리라고 여긴다. 수 십여 종에 이르는 라멘, 지역마다 제각기 다른 라멘 맛, 20권이 넘는 장편 라멘만화, 요코하마의 라멘박물관 등 일본인들의 라멘 사랑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조금만 둘러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라면은 한국에서도 첫째가는 애호식품 가운데 하나다. 몇 년 전부터는 일본을 찾는 우리 관광객이 크게 늘어나면서 라멘을 경험해본 이들이 늘자, 서울 거리에서도 일본 라멘집들이 속속 문을 열고 있다.
식욕과 성욕은 닮은꼴? 믿거나 말거나…
■ 대현동 아지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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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모토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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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동에 있는 '아지모토'는 일본에서 10년간 직장생활을 한 주인 김종섭(46)씨가 자신의 입맛을 따라 만든 라멘집이다. 그는 일본에서 사는 동안 요리 프로그램을 모두 녹화해두고 연구했다고 한다. 면은 자신이 직접 뽑아서 냉장고에 숙성시키고, 간장은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장시간 졸인다고 한다. 차슈는 돼지고기를 삶아 김씨만의 양념장에 고온과 저온을 오가며 12시간 졸여 만든다. 삶았지만 탱탱한 맛이 남아 있다. 부드러운 과자를 먹는 것처럼 바삭하면서도 포근하다. 가격도 착해서 '돈고쯔라멘'이 5천원, 소유라멘이 6천원, 미소라멘이 6천5백원이다. 미니동이나 고꾸신라멘도 맛있다.
'돈고쯔라멘'의 국물은 맑은 기운과 뽀얀 색이 적당히 어우러져 참기름보다 고소하다. 적당히 쫄깃한 면은 야채, 반숙달걀과 조화를 이뤄서 젓가락을 잡아끈다. 입안 가득 채우는 맛난 향기 때문에 먹는 내내 옆자리 친구도 돌아보지 않을 정도다. 마치 사랑에 미쳐 있는 동안 발휘되는 놀라운 집중력이 연상된다. 땀이 흠뻑 얼굴에 맺히고 나면 '사랑을 마친' 것 같은 뿌듯함이 몸에 퍼진다. (02-313-0817)
■ 이태원 라면81번옥
이태원은 세계의 갖가지 먹을거리가 모여 있는 곳이다. 일본 라멘집도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2003년에 생긴 '라면81번옥'이라는 이름의 라멘집은 일본인 카사하라(56)가 직접 라멘을 만든다. 6년 전 한국에 오기 앞서 일본에서 25년 동안 요리사로 일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어릴 때 먹었던 소박하고 기교를 부리지 않은 라멘을 내놓는다. 맛난 소유라멘과 미소라멘을 맛 볼 수 있는 곳이다. 적당히 탱탱한 면발에 간도 적당히 배어 있다. 삿포로의 미소라멘보다 짠 맛이 덜해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별난 이벤트도 있다. 소유라멘 4인 분량을 국물까지 먹으면 무료다. 하지만 도전에 실패하면 벌금 2만원을 내야 한다. 지금까지 1412명이 도전해서 246명이 성공했단다. 가격은 7천원~1만3천원. (02-792-2233)
■ 홍대 오네상과 하카다분코
홍익대 근처 극동방송국 맞은편에 있는 '오네상'에는 냉라멘이 있다. '히야시추카'라는 이름이다. 디자인 공부를 위해 일본에 갔던 주인 김성실(37)씨가 일본 라멘에 반해서 만든 집이다. 냉라멘은 생면을 삶아 찬물에 헹구고 갖은 야채를 그 위에 얹고 소스를 뿌려 먹는다. 가격은 5천원~7천원. (02-308-9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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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 부근의 <하카다분코> . 길게 늘어선 줄이 인기를 실감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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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상'건너편 골목에 '하카다분코'가 있다. 길게 늘어선 줄이 언제 끝날지 몰라 암담한 기분이 든다. 약 45분~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서서히 짜증이 몰려올 때쯤 안에서 들어오라는 기별이 온다. 주방이 훤히 보이고 잘 생긴 청년들이 요리와 서빙을 한다. 이곳은 돈고츠라멘만 한다. 진한 맛의 인라멘과 상대적으로 덜 진한 청라멘을 6천원에 판다. 국물이 걱정될 정도로 뽀얀 색이다. 일본 후쿠오카의 돈고츠라멘의 느끼한 맛향이 '훅' 하고 얼굴에 번진다. 그곳의 맛과 비슷한 듯, 아닌 듯 아리송하다. 면은 아주 얇다. 독특한 맛이 색다르다. (02-338-5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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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동에 있는 <아지모토>의 ‘돈고쯔라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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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구정동 유메이라멘
강남 압구정동 시끌벅적한 술집 골목 한쪽에는 '유메이라멘'이 있다. 좁다란 들머리를 지나 들어가면 2차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의 한 허름한 방안에 처박힌 기분이 든다. 모반의 계획을 세우는 곳 같은 비밀스러운 분위기에서 라멘을 주문한다. 이 집에도 냉라멘이 있는데, 요즘 가장 인기가 있단다. 차슈는 오향장육 맛이 난다. 파가 다른 곳보다 수북하게 면 위를 덮는다. 면 사이를 떠도는 버섯에선 단맛이 난다. 케이블티브이에서 간간이 얼굴을 볼 수 있는 가수 한휘가 다른 이와 동업하는 곳이다. (02-514-4104)
'라멘만땅' 같은 체인점도 있다. 서초점(02-749-1114)이 1호점이다. 라멘만땅은 우리식 입맛을 고려한 라멘을 내놓기 때문에 이 집에 가서 주문할 땐 이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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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이 열쇠…자칫하면 냄새 역해 간장 된장 풀어 면 뽑아 냉장고에 며칠간 숙성…고명이 화룡점정
일본 라멘의 알파와 오메가
일본 라멘은 1800년대 요코하마에 들어온 중국인들이 손으로 면을 뽑아 먹었던 국수(라우미엔 納麵)에서 유래됐다. 닭뼈나 돼지뼈, 말린 멸치 등을 넣어 우린 물로 국물을 만드는 것이 기본이다. 자칫 역한 냄새가 많이 날 수 있는 재료들이라서 간장, 된장 등의 발효 장을 넣어 냄새도 없애고 맛도 낸다. 미소라멘(된장)과 소유라멘(간장) 등이 그것이다. 소금이 양념인 시오라멘은 발효장이 아니라서 손이 더 간다. 사골국물에 일본인들이 면을 넣어 먹는다면 우리는 밥을 말아 먹는다. 알고 보면 설렁탕, 곰탕도 만드는 원리는 일본라멘과 비슷하다. 요즘 일본라멘은 닭뼈나 돼지뼈만으로 국물을 만들지 않는다. 다시마, 말린 생선, 닭껍질, 조개관자, 버섯 등 집집마다 다른 개성과 맛을 내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 라멘은 국물의 개성이 전체 맛을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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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고츠라멘으로 유명한 ‘후쿠오카’(위)와 미소라면으로 유명한 ‘훗카이도’(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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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라멘의 면발은 우리 라면보다 가늘다. 면을 뽑아 며칠 동안 냉장고에 숙성시킨다. 막 뽑아낸 면은 펄펄 날리는 밀가루가 가라앉지 않은데다 끈기도 부족하다. 밀가루 특유의 비릿한 냄새도 남아 있다. 하지만 3~4일 냉장고에서 푹 자고 나와 몸이 가뿐해진 면은 발레리나가 춤을 추듯 통통 튀는 탄력으로 입안에서 입맛을 돋군다.
마지막 화룡점정은 고명이다. 국물이나 면 이상으로 그 위에 올라간 고명을 즐기는 것이 일본 라멘을 잘 먹는 요령 중 하나이다. 전통적으로 차슈(구운 돼지고기 편육)와 달걀, 어묵이 고명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달걀은 날달걀, 반숙달걀, 완전히 익은 달걀, 조림달걀 등이 있는데 어떤 달걀을 올릴지는 주인장 마음이다. 조림달걀이 조금 더 정성스러워 보인다.
차슈는 굽지 않고 삶기도 한다. 살짝 데치고 여러 가지 양념에 장시간 조린 차슈가 맛있다. 최고는 역시 구운 것이다. 구운 차슈의 겉은 꼬마의 볼살처럼 꼭 누르면 튕겨 나올 정도로 탱탱한 느낌을 준다. 요즘에는 매실장아찌, 김, 죽순 등이 고명으로 올라오기도 한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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