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군 방산면 장평리 마을회관. 할아버지들이 둘러앉아 짚과 나무를 이용해 갖가지 생활용품과 전통놀이도구를 만들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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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리웠소, 구수한 고향의 추억 눈다운 눈 한번 뒤집어쓰지 못하고 겨울이 깊어간다. 찬바람만 몰아치는 메마른 겨울이다. 산도 들도 나무도 벌거숭이다. 그러나 찬바람에 묻힌 산골짜기를 잘 들여다 보면, 이웃이 함께 모여 훈훈하게 겨울을 나고 있는 마을을 만날 수 있다. 겨울은 농삿일의 휴식기이자, 새 봄 새 농사를 앞두고 생활도구들을 마련하는 요긴한 시간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가을걷이를 마치고 추위가 닥치면 이웃끼리 모여앉아 새끼 꼬고, 짚신 삼고, 가마니 짜고, 지게를 만들며 겨울을 났다. 이런 전통을 아직도 지켜가는 마을이 일부 남아 있어, 고향의 추억에 목마른 여행객의 발길을 잡아 끈다. 옛날 우리 농촌마을의 겨울이 어떻게 깊어갔는지 알려면 양구군 방산면 장평리 마을회관 문을 열어보면 된다. 가마니·소쿠리·짚신·멍석·삼태기·다래키…. 볏짚 향기 은은한 이름들, 조상의 손때 묻고 발때 묻어 더 정겨운 이름들이 호명되는 공간이다. 손재간 좋은 할아버지들 들러않아
짚신·설피 끼고 지게 멍석 삼태기…
도란도란 퍼지는 옛이야기와 함께
훈훈한 겨울밤은 깊어만 가고… 짚단과 나무토막들이 널린 널찍한 방바닥에는 10여명의 할아버지들이 편한 대로 둘러앉아 짚신을 삼고, 설피(눈길용 짚신)와 설피지팡이를 만들고, 방패연 살 붙이기에 여념이 없다. 벽 한쪽엔 벌써 지게·소쿠리·다래키·맷방석·삼태기·키·팽이 등 생산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이미 겨울이 깊었음을 말해 준다. 장평리 노인회장 이종호(73)씨가 소나무 조각을 다듬어 얼레를 만들면서 말했다. “늙은이덜 허는 일이 화투 치고 술 마시는 것이 더 있었어? 시방은 을매나 좋아. 남 보기 좋구, 용돈두 생기구.” ‘손을 자주 놀려 치매도 예방하고, 마을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친목도 다지자는 차원’에서 10여년 전 노인회에서 일을 벌였다. 5년 전 겨울부터는 20여명이 회관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각자 가장 자신있는 물건 몇가지씩을 집중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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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70~80대인 이 ‘수공예 기술자’들이 옛 손재간을 되살려 만들어내는 전통 생활·놀이용품은 20여가지에 이른다. 물동이를 일 때 머리를 보호하던 똬리, 짚으로 만든 약초배낭인 홀치기, 짚신과 짚신 모양을 내는 신골, 신골 두드리던 신골방망이, 달걀 담아두던 짚달걀집, 소 주둥이에 씌우던 멍에, 먼길 갈 때 소에게 신기던 쇠신, 시루떡 찔 때 바닥에 깔던 시루밑방석까지, 전통 농가의 필수 생활용품들이다. 요즘엔 군청의 행사용 물건 주문도 들어오고, 지나는 길에 구경 하다 사들고 가는 관광객도 생겼다. 노인네들이어서 쉽게, 대충대충 만들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물건이 비록 상점의 제품처럼 정교하고 매끄럽지는 않지만 한올 한올 정성이 깃든, 투박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자연산이다. 짚 한 단을 고를 때도 가을걷이 직후 집들을 돌며 미리 뉘집 짚이 좋은가, 길이·빛깔 등 품질을 봐뒀다가 가져다 쓴다. 손재간들도 만만찮은 수준이다. 마을 이름 장평리가 진드루(긴 들판)에서 나왔다. 마을 앞 수입천 직연폭포의 소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설명하던 노인회장이 문득 한 할아버지를 가리킨다. “저 냥반. 저 저, 손놀림 좀 보시우.” 묵묵히 설피를 만들고 있는 김희선(75)씨. 과연, 짚으로 새끼를 꼬아 엮고 묶고 다듬는 솜씨가 거침없고 날래다. “저 양반, 설피도 설피지만, 쇠신과 시루밑방석 맹그는 데선 따라갈 자가 읍는 일인자여.” 회관 문이 열리더니, 벙거지를 눌러쓴 키 작은 할아버지가 얼굴을 들이민다. 그 때 멋진 방패연을 만들어 놓고 쉬던 할아버지가 외쳤다. “오, 저 양반! 방패연 만들기 일인자가 오네 그랴.” 왜 ‘일인자’인지 설명이 시작된다. “이 양반이 맹기는 연은 날아오르는 것 자체부터가 달라. 여기 비하면 내 연은 장난이야, 장난.” 가만히 듣던 ‘일인자’ 서원식(79)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니가 휑한 입을 열었다. “장난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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