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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27 14:36 수정 : 2008.11.27 14:36

하남성(河南省·허난성) 정주(鄭州·정저우) 기행

먼저 하남성(河南省·허난성)부터 소개한다. 하남성은 중국 중부, 황하 중하류에 위치하고 있는 인구 1억의 대성(大省)이다. 하남성 지역이 대부분 황하(黃河) 이남에 속하므로 하남(河南)이라고 칭한다. 고대에는 이 지역을 예주(豫州)라고 칭했으므로, 오늘날 하남성의 약칭을 ‘예(豫)’라고 한다. 또 치수(治水)로 유명한 전설상의 임금, 우(禹)가 중국을 구주(九州)로 나누어 통치했을 때, 예주가 구주의 한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던 까닭에, 이 지역을 중원(中原) 또는 중주(中州)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남성의 전체 면적은 16만 7천㎢(남북한 면적은 22만3170km²)이며, 서고동저(西高東底)의 지세다. 태행산맥(太行山脈), 복우산맥(伏牛山脈), 동백산맥(桐柏山脈), 대별산맥(大別山脈)이 북, 서, 남쪽의 삼면을 반원 형태로 감싸고 있다. 중동부 지역은 황회해(黄淮海) 대평원이다. 총 면적 가운데 평원과 분지가 55.7%, 산지가 26.6%, 구릉이 17.7%를 차지한다. 하남성에서 가장 높은 산은 삼문협시(三門峽市) 관내의 영보(靈寶)에 있는 노아분뇌(老鴉岔뇌: 해발 2413.8m)이다. 일반적으로 하남성은 산악 지대가 반, 평야가 반이라고 한다.

기후는 북부는 온대, 남부는 온대와 아열대가 교차한다. 연평균 강우량은 1381∼533㎜인데, 지역별로 강우량 편차가 무척 크다. 하남성은 중국에서 가장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지역이다. 2007년 중국의 양식 생산량 통계자료에 의하면, 524,5억㎏을 생산하여 전국의 수위를 차지했다. 따라서 하남성을 중국의 ‘식량 창고’라고 부른다. 광물 자원도 풍부한데 몰리브덴, 석회석,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이 생산되고 있다.

하남성은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하나인 황화문명이 탄생한 지역이다. 중국 최초의 왕조라고 할 수 있는 하(夏)나라 때부터 북송(北宋)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20여 개 왕조가 이 지역에 도읍을 정하였다. 중국 8대 고도(古都) 가운데 네 곳이 하남성에 있는데, 상(商) 나라 도읍지 정주(鄭州), 은(殷) 나라 도읍지 안양(安陽), 일곱 개 왕조의 도읍지 개봉(開封), 아홉 개 왕조의 도읍지 낙양(洛陽) 등이다. 따라서 하남성에는 고대의 역사 유물과 문화 유산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처럼 천혜의 자연 조건과 풍부한 문화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하남성이 1978년 개혁, 개방 이래 중국정부의 연해 도시 개발 우선 정책으로 인하여 중국에서 경제가 낙후된 성(省)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또 그 동안 중국정부의 공업 우선 정책에 따라 농업이 근간인 하남성이 소외된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중국 전역에 고속도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자, 하남성은 물류 기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중국 전역을 하나의 교통 지도로 본다면 하남성은 거대한 십자로에 해당한다. 현재 중국의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주요 고속도로들이 대부분 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다. 또 철로도 이곳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따라서 하남성은 중국에서 교통의 요지 중의 요지로써 날로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향후 하남성은 내륙의 대표적 물류 기지로서 자리매김할 것이다.

정주(郑州·정저우)는 하남성 중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하남성의 성도(省都)다. 북쪽으로는 황하(黄河)가 흐르는데, 황하를 조망할 수 있는 황하풍경명승구(黃河風景名勝區)까지는 시내에서 차로 1시간 거리다. 서쪽으로는 중국 오악(五岳) 중 중악(中岳)에 속하는 숭산(嵩山: 해발 1440m)이 있다. 그 유명한 소림사(小林寺)가 바로 숭산 자락에 있다. 동남쪽으로는 광활한 황회평원(黄淮平原)이 펼쳐져 있다.

정주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개봉(開封)이, 서쪽으로는 낙양(洛陽)이 있다. 이 세 도시가 수평축으로 연결되어 있고, 기차로 정주에서 개봉까지는 1시간, 낙양까지는 2시간 30분 걸린다. 정주는 중국 10대 고도(古都) 가운데 제3대 고도인 낙양과 제5대 고도인 개봉을 좌우에 두고 있으므로, 낙양과 개봉을 찾는 관광객들이 대부분 정주를 방문한다.

정주 지역은 온대 대륙성 기후이며 사계절이 분명하고, 연평균 기온이 14.4℃이다. 봄은 3월부터 시작되며 바람이 자주 불어 먼지가 많이 일어나지만, 북경, 천진, 제남 등 화북평원의 주요 대도시에 비해서 황사는 발생 빈도가 낮다. 일례로 2008년 봄(3. 1∼5. 30)에는 단 두 차례의 약한 황사 현상이 관측되었을 뿐이다. 1년 중 7∼8월이 가장 무덥다. 근래에는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인하여 38℃를 웃도는 혹서가 며칠 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하지만 습도가 그다지 높지 않으므로 찌는 듯 한 무더위는 아니고 그늘에 있으면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가장 추운 계절인 1월의 평균 기온이 0.2℃ 정도이므로 혹한의 겨울 날씨는 아니다. 하지만 정주는 강한 바람이 자주 부는 지역이기 때문에 찬바람이 불 때 느끼는 체감 온도는 상당히 낮다. 더구나 주택이나 공공장소의 난방 시설이 빈약하기 때문에 실제로 느끼는 추위는 상당하다. 도시민이 거주하는 정주 시내는 강우량이 적고 주위에 산이 없으므로 건조한 날씨가 지속되고 바람이 자주 부는 환경이다. 중국의 다른 대도시들처럼 희뿌연 안개도 자주 낀다.

정주는 황하와 회하(淮河)의 양대 수계(水系)에 속해 있다. 정주 지역을 통과하는 황하의 길이는 150.4㎞이다. 중원의 유명한 고도(古都)들과 마찬가지로 정주도 황하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정주, 낙양, 개봉, 삼문협(三門峽), 제원(濟源), 초작(焦作), 신향(新鄕) 등의 하남성의 주요 도시들은 모두 황하 유역을 따라 형성, 발전하고 있다. 세계 4대문명의 하나이자 동아시아 문명의 모태가 되는 황하문명이 하남성의 중원 지역에서 탄생한 까닭은 바로 황하가 이 지역을 흐르고 있는 덕분이다.

정주는 중원(中原)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중국 교통의 중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정주 지역의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에 대하여 “중추에 우뚝 솟아 천하의 험준한 요새를 통제한다.(雄峙中枢,控御险要)”, “중원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得中原者得天下)” 등의 표현을 옛날부터 즐겨 사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옛날에 정주는 전략적으로 중원의 중심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중국 대륙의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교통 노선의 중추다. 또 정주는 중국 대륙의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를 잇는 철도와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지역이다. 중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철도인 경광선(京廣線: 북경에서 광동성 광주까지)과 동서를 가로지르는 농해선(陇海線: 상해에서 섬서성 서안까지)이 바로 정주에서 동서남북으로 교차한다.

철도뿐만 아니라 개혁 개방 이후에 건설된 중국을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는 고속도로들도 정주 지역을 지나고 있다. 정주를 중심으로 북경(北京)과 홍콩, 마카오를 연결하는 경향오(京香奧)고속도로가 남북으로, 강소성 연운항(連雲港)과 섬서성 서안(西安)을 연결하는 연곽(連霍)고속도로가 동서로 각각 뻗어있다. 또 107번, 310번 국도가 정주 경내를 통과한다. 정주 시내에서 약 30㎞ 정도 떨어져있는 신정(新鄭) 국제공항은 국내외 30개 도시와 연결되어 있다. 현재(2008년 11월) 한국과는 대한항공이 인천, 정주 간을 독점 운행을 하고 있다.

또 아시아 최대의 기관차 연결 역, 중국 최대의 화물 하역과 운반 시설이 정주에 있으며 또 우편, 통신 시설 등이 대단히 잘 갖추어져 있다. 따라서 오늘날 정주는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과 물류 그리고 통신의 중추 도시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물류와 통신 분야가 다른 산업에 비해 발전의 속도가 무척 빠르다. 특히 한국 기업들에게 정주는 중국 내륙으로 진출하는 전초 기지로서 대단히 중요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정주 인구는 2007년 기준으로 736만 명이며, 이 가운데 시내 거주 인구는 300여만 명이다.

하남성의 성도(省都)인 정주가 고도(古都)라는 측면에서 이웃 도시들인 개봉과 낙양에 비해 덜 알려진 게 사실이나, 2004년 11월에 개최된 중국고도학회(中國古都學會)에서 제8대 고도로 공인을 받았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다. 오늘날 중화민족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황제(黃帝)의 출생지인 이른바 ‘헌원(軒轅)의 언덕’이 정주시 경내의 신정(新鄭)에 있다. 그리고 중국역사상 최초의 노예제 왕조였던 하(夏)나라의 도읍지인 양성(陽城)이 곧 지금의 정주시 등봉(登封)이다.

사실 정주가 제8대 고도로 공인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1950년 이래 정주 시내에서 상(商)나라 성터, 토담, 도기, 청동기 유물 등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성터의 전체 면적은 25㎢로 확인되었는데 특히 토담은 판축(版築) 공법으로 한 층씩 쌓았으며, 전체 길이가 7㎞, 가장 높은 곳이 9m, 가장 낮은 곳이 1m이다. 이 성터 유적은 하남성 안양(安陽) 은허(殷墟)의 상나라 전기 유적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 정주시 남관(南關) 일대에서 상나라의 외성 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정주 시내의 상나라 성터는 도읍지였음이 분명하다.

기원 전 1046년 은(殷) 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그의 아우 희선(嬉鮮)을 이 지역에 봉하고 관국(管國)이라 칭했다. 수(隋) 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3년(583)에 이 지역을 처음으로 정주(鄭州)라고 불렀다.

1948년 10월 22일에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 군대를 몰아내고 정주를 해방시켰다. 1954년 하남성 성도(省都)가 개봉(開封)에서 정주로 옮겨온 이래, 정주는 명실상부하게 하남성의 중심이 된 것이다. 정주시는 행정구역상 금수구(金水區) 등 6구(區), 등봉시(登封市) 등 5시(市), 중모현(中牟縣)의 1현(縣)으로 나뉘어져 있다. 6구 가운데 금수구와 중원구(中原區) 그리고 이칠구(二七區)가 시내의 중심 지역에 해당한다.

정주의 유구한 역사는 풍부한 문화 유적을 남겼다. 정주에는 1,400여 곳의 문물과 유적이 있다. 그 가운데 국가급문물보호단위(国家级文物保护单位: 한국의 국보에 해당함)는 26곳이다. 정주 시내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숭산(嵩山)은 중국정부가 특별히 지정한 전국 44개의 풍경명승구(風景名勝區) 가운데 한 곳으로 천하제일의 명찰이라는 소림사(少林寺)를 바로 산 아래 품고 있다. 또 숭산 자락에는 중국 최초의 천문대라고 할 수 있는 주공측경대(周公测景台), 원대(元代)의 관성대(观星台), 송대(宋代)의 사대(四大) 서원 가운데 하나인 숭양서원(嵩阳书院) 그리고 현존하는 최대의 도교 건축군인 중악묘(中岳庙)등이 있다. 또 중국인의 인문시조(人文始祖)라는 황제(黄帝),열자(列子), 자산(子产), 한비자(韓非子),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 등이 모두 정주가 배출한 유명한 인물들이다.

2·7 광장과 그 주변

정주 시내는 격자 모양의 도로 체계를 갖추고 있어서 교통이 무척 편리하다. 시내의 한 중심은 ‘2·7 광장’이다. 2·7 광장에는 14층, 63m 높이의 ‘2·7 기념탑’이 있다.

1923년 2월 1일 경한철로(京漢鐵路)의 각 기차역의 노조 대표들이 교통이 편리한 정주의 보락원(普樂圓)에 모여 총공회(總公會)를 결성하는 대회를 열었다. 그러자 직계군벌(直系軍閥)의 우두머리 오패부(吳佩孚)가 곧바로 군경을 동원해 참석자들을 강제로 연행하고 대회장을 폐쇄했다. 이에 격분한 노동자 대표들은 경한철로 노동자 2만여 명을 조직하여 동맹 파업을 결의했다. 2월 4일에 급기야 총파업이 단행되자, 경한철로의 모든 열차가 일시에 운행 중지되어 여객과 화물 수송이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다음 날부터 철로 파업에 지지하는 동조 세력이 늘고 노동자 1만여 명이 가두 시위를 벌이자, 2월 7일에 오패부는 정주, 한구의 강안(江岸), 북경 근처의 장신점(長辛店) 등에서 피비린내 나는 유혈 진압을 단행했다. 이 때 노동자 40여 명이 피살되었고 2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60여 명이 체포되고 1,000여 명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중국현대사에서 이 유혈 사태를 ‘이칠참안(二七慘案)’이라 한다. 그런데 이 파업은 사실상 린시앙첸(林祥謙), 스양(施洋) 등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따라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고 난 뒤, 1951년에 정주시인민정부는 혁명 열사와 철도 노동자들 추모하고 그들의 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정주 시내 한 중심가에 2·7 광장을 조성했고, 1971년 9월 29일에 지금의 탑을 만들었다. 이 탑이 정주의 상징이며 정주를 대표하는 명소 가운데 한 곳이다.

정주 시내 어느 곳에서나 버스를 타면 이 광장에 쉽게 도착할 수 있다. 정주 시내를 운행하는 버스의 차비는 2위안 또는 1위안이다. 같은 시내버스라도 낡은 버스는 1위안을 받는다. 하지만 외관상 구분이 잘 되지 않아 타기 전에 요금을 확인하는 게 좋다.

2·7 광장 주변은 정주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므로 대형 백화점, 호텔, 상업 시설들이 광장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광장 안에는 하남성에서 유명한 ‘덕화(德化) 거리’가 있다. 서울의 명동(明洞)과 같은 곳이다. 중국 역사상 두 번째 왕조였던 상(商) 나라의 국명이 장사 상(商) 자인 까닭은, 당시 상나라의 도읍지였던 지금의 정주 덕화 거리에서 최초로 대규모의 물물 거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덕화 거리는 3500여 년의 상업 전통을 이어오는 동북아시아 최초의 상업 지구라고 할 수 있다.

근대에 이르러 청(淸) 광서(光緖) 27년(1901) 3월 노한(蘆漢) 철로의 정주역이 완공되자,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 몰려와 지금의 덕화 거리를 이루었다. 이곳은 주로 의류 위주의 상품들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는 데, 길거리를 걸으면서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한국 유행가들을 듣는 것은 더 이상 생경한 일이 아닐 정도로 한류 열풍이 불고 있다.

덕화 거리에서 남서 방향의 대동로(大同路)로 조금 걸어가면, 중국에서 북경역 다음으로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인 정주역 광장이 나온다.

덕화 거리에서 정주역에 이르는 지역은 주말은 말할 것도 없고, 평일에도 인산인해를 이룬다. 아마 이 지역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지역 가운데 한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지역에서 분주히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볼거리다.

2·7 기념탑이 있는 이칠로(二七路)로를 따라 북쪽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대상해성(大上海城)이라는 상가가 있다. 이 상가 2층에 가면 뜻밖에도 한국 음식을 파는 전문 음식점이 몇 곳 있다. 저렴한 가격에 한국 음식들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정주에 있는 한국 식당에 가보면 손님들이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다.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은 거의 없다. TV 드라마를 통해 한국 문화를 접한 젊은이들 사이에 한국 음식은 하나의 세련된 요리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이칠로 주변에는 정주에서 가장 큰 인민공원(人民公園)이 있다.

수령이 백년가까이 되는 듯 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봄철에는 목단(牧丹)이 화사하게 핀다. 가히 정주의 허파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하남성 박물관과 동물원

하남성 박물관은 시내 중심 도로의 하나인 농업로(農業路)와 경칠로(經七路)가 교차하는 곳에 있다. 건물 외관이 영락없는 이집트 피라미드 모양인데,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하남성 등봉(登封)의 관성대(觀星臺)를 본뜬 것이라고 한다. 입장료는 무료다. 구석기 시대의 유물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상나라 때의 갑골문, 청동기 유물들이 특히 볼만하다.

전시된 유물들 가운데 농기구, 도검류들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 갑골문을 읽어보면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기원한 내용들이 많다. 사람들의 욕망은 수천 년이 흘렀어도 변한 게 별로 없는 것이다.

박물관 근처의 화원로(花園路)에는 동물원이 있다. 입장료는 20위안이다. 눈길을 끄는 동물들이 별로 없고 규모 또한 크지 않다.

정동신구(鄭東新區)

정주시는 현재 정주시 동쪽에 대규모의 신도시 정동신구(鄭東新區)를 건설하고 있다. 신도시는 용호남구(龍湖南區), 상주물류구(商住物流區), 용자호구(龍子湖區), 과기원구(科技園區) 등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총면적이 약 150㎢이고, 예상 주거 인구는 150만 명이다.

정주시에서 이처럼 방대한 규모로 신도시 건설에 매진하고 있는 이유는 구도심의 인구 밀집 문제, 교통 체증, 환경 오염 등 여러 문제들을 해결함과 동시에 환경 친화적이고 시민에게 안락한 주거 환경을 보장하며 새롭고 현대적인 비즈니스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정주시를 미래 지향적인 도시로 발전시키는 것에 있다. 현재 신도시 정동신구의 기본 인프라는 이미 조성되었고 상업용 빌딩과 주거용 아파트가 마천루를 이루고 있다. 인공 호수인 여의호(如意湖)를 중심으로 상업 지역이 형성되어 있는데, 고층빌딩, 무역전시회장, 하남성미술관 등이 이곳에 밀집되어 있다.

정주 시내에서 정동신구에 가려면 자형산공원(紫荊山公園) 입구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정동신구에는 크고 작은 공원들이 많아 마치 공원 속에 도시가 있는 것 같다.

정주박물관 및 그 주변

정주박물관은 시내 중심의 숭산남로(嵩山南路)에 있다. 이 박물관은 하남성 박물관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시설이 현대적이고 유물 또한 적지 않다. 입장료는 무료다. 상나라 때 옥으로 만든 도끼, 창, 낫 등을 전시해 놓았으며, 청동기 유물 가운데, ‘수면문가(獸面紋斝: 짐승 얼굴 무늬 술잔)가 특히 아름답다.

정주박물관 바로 옆에는 정주과학기술관이 있는데 학생들의 과학 체험 장소다. 정주시정부청사, 정주시인민대표대회청사, 정주시공산당청사 등의 주요 관공서가 박물관 근처에 있다.

이 지역 거리의 가로수가 정주 시내에서 가장 아름답다. 또 이 근처에는 녹성광장(綠城廣場), 벽사강공원(碧沙崗公園) 등이 있어 도시의 녹음(綠陰)을 한층 더해준다. 이곳에서 중원동로(中原東路)를 따라 조금 걸어가면 하남성 최고 명문인 정주대학교 구캠퍼스가 나온다. 구캠퍼스에서는 주로 대학원 과정을 운영한다.

신캠퍼스는 시 남쪽 외곽의 고신기술개발구(高新技術開發區)에 있는데 일개 소도시를 방불케 할 만큼 규모가 크나 도심에서 너무 멀어 다니기가 불편하다.

소림사(少林寺)

지난 6월 중순 학교 행사의 일환으로 소림사에 간 적이 있다. 소림사는 ‘선종(禪宗)의 조정(祖廷)이며 천하제일의 명찰’이라는 소림사는 정주시 등봉(登封)의 소실산(少室山) 자락에 있다. 정주에서 차로 1시간 거리다. 소림사는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가 태화(太和) 20년(496)에 천축(天竺)에서 선법(禪法)을 전하러 온 승려, 불타(佛陀)를 위해 지은 사찰이다. 사찰이 소실산의 숲속에 있다고 하여 소림사라고 했다.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达摩)가 이곳에서 9년 동안 면벽 수도하고 가사(袈裟)를 혜가(慧可)에 전한 뒤부터 중국 선종의 본산으로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원래 소림 무술은 스님들이 용맹정진(勇猛精進)하기 위해 고안한 운동이었다. 그런데 당(唐) 나라가 막 건국될 무렵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이 왕세충(王世充)의 할거 세력을 진압하는 데 소림사의 스님들이 큰 공적을 세웠다. 그 후 소림 무술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역조(歷朝) 황실의 승병 친위대로서 위세를 떨쳤다.

소림사 주차장에 도착하자 소림사를 알리는 석패방(石牌坊)이 눈에 들어온다. 세계적인 관광지답게 주변 환경과 시설이 잘 조성되어 있고,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주차장에서 경내 입구까지는 1㎞ 남짓한 거리인데 전동차를 타고 들어갔다. 소림사 입구에서 본 사찰은 의외로 규모가 작다. 하지만 수령이 수백 년 넘은 고목들이 소림사의 오랜 역사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산문(山門)을 들어가자 비석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거대한 나무에는 작은 홈들이 파여 있다. 스님들이 무술을 연마하면서 손가락으로 낸 구멍들이라고 한다. 천왕전(天王殿)에는 사대천왕(四大天王)이 눈을 부라린 채 서 있다. 그 표정과 동작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천왕전을 지나자 4층 종루(鐘樓)가 하늘을 향해 날아갈 듯이 앉아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에는 석가모니, 아미타불, 약사불을 모셔 놓았고 십팔나한상이 시립(侍立)하고 있다. 대웅보전 옆에는 당태종(唐太宗) 이세민의 어서(御書)를 새긴 거대한 비석이 있다.

이세민이 직접 썼다는 ‘세민(世民)’이라는 수결(手決)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대웅보전 뒤에는 장경각(藏經閣)이 있다. 스님들이 불경을 쌓아놓고 강학하는 곳이다. 장경각 마당에는 명(明) 나라 만력(明萬历) 연간에 주조한 철종(铁钟)이 있다. 장경각 동남쪽의 건물은 스님들이 참선하는 선방(禪房)이다. 방장(方丈)의 거처인 방장실(方丈室)을 지나자, 불(佛)의 절대 진리를 나타내는 석가모니의 법신상(法身像), 비로자나불이 나온다.

소림사에 가기 전에는 보리달마 이후 육조(六祖) 혜능(慧能)에 이어지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은은한 선풍(禪風)이 사찰을 감싸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림사는 내가 기대한 선풍은 온데간데없고 잘 조성한 관광지에 불과했다.

관광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 소림사에서 중국인들의 종교에 대한 인식을 생각해 보았다. 역사적으로 중국 종교, 구체적으로 말해서 유·불·도 삼교(三敎)는 공리주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지고의 유일신에 종속되어 절대 복종하기보다는 삶의 방편과 통치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했다. 어떤 종교든 중국에서는 사람을 위한 실용 노선을 견지해야 만이 발전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중국인들의 관념 속에서 불교는 병을 치료하고, 재해를 없앨 수 있으며, 아들을 낳게 할 수 있으며,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게 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물론 지극한 정신 세계를 추구한 선지식(善知識)들도 많았지만, 대다수의 민중들은 기복의 수단으로써 불교를 받아들였다.

또 유일신 사상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다양한 종교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어울릴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중국 종교는 관용 정신과 포용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 역사상 중국에서는 서방 세계와는 다르게 대규모의 종교 전쟁이 별로 없었던 것이 바로 중국인들의 이런 가치관에 기인한다고 본다.

소림사도 마찬가지다. 부처의 깨달음을 이신전심으로 우매한 중생들에게 전하려는 노력보다는 소림 무술을 상업화하여 더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여 치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소림의 스님들이 스님 같지 않고 무술의 대가나 세상의 이익에 밝은 사업가처럼 보이는 것이다.

소림사 주변에는 무술 도장들이 많다. 학생들이 미래의 ‘리사오롱(李小龍)’을 꿈꾸며 무술을 연마하고 있는데, 심지어 대여섯 살 밖에 안 되는 어린이들도 부모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와 수련하고 있다고 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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