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7.16 12:03
수정 : 2010.07.16 12:08
퇴모산 정상에서 바라본 강화도 서쪽 해안 모습. 이곳의 바다는 항상 고요하고 평화롭다.
오랜만에 이틀 휴가를 얻었다. 가장 알차게 보내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새로운 산에 가는 것이다. 강화도 주말농장 고구마 밭의 김매기도 해야 한다. 6월 중순 이후 비가 여러 차례 와서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고 농장 지도자한테서 연락이 왔다. 지금 풀을 그대로 두면 수확에 큰 차이가 난다. 가는 김에 산도 강화도에서 찾기로 한다.
모처럼 식구 셋이서 함께 나선다. 2010년 6월24일이다. 오전 8시36분에 출발해 10시에 밭에 도착한다. 긴 고랑 하나가 우리 몫이다. 지난달에 고구마 순 200개를 심었다. 고구마 잎이 덮일 정도로 잡초가 무성하다. 며칠 전에 김매기를 한 옆 이랑과 대비가 된다.
욕실에서 쓰는 플라스틱 의자를 고랑에 놓고 앉는다. 한쪽 다리로는 쪼그리고 앉을 수가 없어 생각해낸 고육책이다. 수시로 의자를 옮겨줘야 하지만 몇 번 해보니 그렇게 불편하지 않다. 땅이 어느 정도 젖어 있어 풀이 그런대로 잘 뽑힌다. 다행이다. 마른날 풀 뽑기는 정말 어렵다. 호미로 아무리 찍어도 바닥이 파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금새 허리가 뻐근하다. 그렇다고 느긋하게 할 수는 없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 나만 손해다. 그래도 셋이서 하니까 훨씬 낫다. 어느새 뽑은 풀이 고랑에 수북하게 쌓인다. 풀을 삼태기에 담아 다른 곳으로 치우려 하니까 보고 있던 동네 할머니가 고랑에 퍼뜨려 그냥 두는 것이 더 낫다고 한다. 하루만 비가 오지 않으면 말라 죽고 그 뒤에는 다른 풀이 올라오는 것을 막아준단다. 두 시간 만에 일을 끝낸다. 앞으로 한번만 풀을 더 뽑으면 가을에 고구마를 캘 수 있다.
12시 조금 넘어 농업기술센터 단지로 향한다. 퇴모산(338m) 아래 자리잡은 이곳에는 기술센터뿐만 아니라 농업박물관과 아르미애월드 등 여러 농업관련 시설이 있다. 강화도에서 나는 농산물을 활용한 식당도 괜찮다. 아르미애월드는 쑥을 소재로 해 음식과 찜질 등 다양한 활용방안을 찾는 곳이다.
점심을 먹고 혼자서 등산에 나선다. 단지 뒤쪽에 퇴모산으로 향하는 등산로가 있다. 퇴모산에서 능선을 타고 동쪽으로 가면 혈구산(466m)으로 이어진다. 안내판을 보니 혈구산까지 왕복 세 시간으로 돼 있다. 실제로는 네 시간은 잡아야 할 것이다. 퇴모산 정상까지는 한시간 반으로 적혀 있다. 일단 혈구산을 목표로 잡는다.
1시15분에 출발한다. 강화도 산에는 물이 거의 없다. 평소보다 큰 1리터짜리 물통을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넣었더니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로 불룩하다. 출발부터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 더운 날씨인 데다 아침부터 계속 운전과 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약간씩 늘어지는 기분이다. 이러다가 가다 보면 나아지기도 한다.
초반부터 좁고 비탈진 흙길이 이어진다. 게다가 무성한 관목들이 길을 거의 가리고 있다. 걸음마다 나뭇가지를 헤쳐가며 지팡이 짚을 곳을 찾아야 한다. 지팡이도 약간씩 미끄러진다. 강화도의 산들이 대개 그렇듯이 숲은 무성하지만 큰 나무는 별로 없다.
퇴모산의 포근한 숲길. 하지만 걸음마다 지팡이로 나뭇가지를 헤쳐야 하므로 상당히 신경이 쓰인다.
등산객이 아무도 없다. 혼자서 탐험을 하는 것 같다. 발걸음에 놀라 온갖 동물들이 푸드득거리며 달아난다. 새도 있고 들짐승도 있다. 녹색 생물이 발 옆을 스쳐 숲으로 들어간다. 뱀인 줄 알고 뜨끔했는데 자세히 보니 주먹만한 개구리다. 숲 속의 평화를 내가 깨고 있는 꼴이다.
비슷한 풍경의 길이 계속된다. 어깨에 부담이 온다. 강화도의 산은 고도가 높지 않아도 만만찮다. 해발 0m에서 출발하는 데다 대부분 산 아래에서 주능선까지 바로 치고 올라간다. 보통은 출발 뒤 20분 정도면 몸에 활력이 생기는데 오늘은 그렇지가 못하다. 계속 나른하다. 끝없는 숲 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첫 갈림길이 나온다. 출발점에서 1100m 왔다. 오른쪽은 혈구산, 왼쪽은 퇴모산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오른쪽으로 간다. 오르막이 이어진다. 산 아래 안내판에 따르면 이쯤에서 약수터가 나와야 하는데 전혀 그런 징조가 없다. 이미 물통의 물을 반 정도 마신 상태여서 약간 걱정이 된다.
곧 능선에 오른다. 오른쪽은 ‘혈구산 3㎞’, 왼쪽은 ‘퇴모산 300m'라고 적힌 안내판이 서 있다. 혈구산까지 거리가 조금 전보다 더 늘어났다.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 능선이긴 하지만 사방의 전망이 꽉 막혀 있다. 퇴모산과 혈구산 정상을 잇는 능선에서 푹 꺼진 곳인 듯하다. 일단 혈구산 쪽으로 향한다. 물을 찾기 위해서다. 몇분을 가봐도 그럴 만한 지형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상태로 혈구산까지 갔다 오는 건 무리다. 몸 상태가 별로인 데다 물도 부족하다. 게다가 내일도 등산을 해야 한다. 아깝지만 혈구산을 포기한다. 갈림길로 돌아와 퇴모산 쪽으로 향한다.
‘퇴모산 300m’라는 이정표는 정확했다. 딱 200걸음이다. 정상에 도착한다. 표지목이 없으면 정상인지도 모를 지형이다. 죽 이어지는 능선에서 약간 솟아오른 곳일 뿐이다. 그래도 정상답게 바다 쪽 전망이 탁 트였다. 이곳 바다는 너무 잔잔해서 호수나 늪 같다. 산도 바다도 모두 거칠지 않은 평화지대다. 출발점에서 2250m 왔다. 2시15분이다. 딱 한시간 걸렸다.
퇴모산 정상 모습. 표지목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급경사 흙길이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으니까 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냥 숲 속에 난 좁은 틈이다. 원래 길이란 게 그렇다. 조심한다. 발밑만 보고 간다. 넘어지면 도와줄 사람도 없다. 휴대전화가 터질지도 의문이다. 이상하게도 험한 지형일수록 경치가 좋다. 넘어지는 김에 쉬어간다는 말이 있듯이 발걸음마다 풍광을 음미한다. 이런 게 등산하는 맛이다.
급경사는 백여m에 그치고 다시 숲길로 들어간다. 새소리가 다양하다. 산 윗부분이어서 공기가 시원하다. 550m를 내려와서 갈림길에 도착한다. 올라오면서 맨 처음 만난 갈림길이다.
몸은 피곤하지만 내려가는 길은 여유롭다. 올라올 때는 바닥을 살피느라 보지 못한 풍광을 즐기면서 터벅터벅 걷는다. 출발점에 도착한다. 3시다. 3950m에 1시간 45분 걸렸다. 약간 미흡하지만 몸 상태로 봐서는 적당하다.
퇴모산은 처음 온 산인데도 친근하다. 거칠지가 않아서 다정하고, 무엇이든 끌어안을 것 같다. 평이한 식생도 약점이라기보다는 익숙함으로 다가온다. 평범함 속에서 나름의 매력이 있다. 좀더 천천히 구석구석 다녀보면 좋을 듯하다.
단지를 둘러본 다음에 다음 목적지인 석모도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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